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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제품 | 전시 | 공연

간장공장에서 열린 특별한 전시, '이름 없는 이름'전

by 야옹서가 2006. 1. 4.

 

[미디어다음/ 2006. 1. 4] 초면인 사람과 인사할 때 무심코 주고받는 명함은 누군가에게는 흔한 종이조각일 뿐이지만, 평생 명함 한 장 갖지 못한 이들에겐 그 의미가 각별할 수밖에 없다. 경기도 이천 샘표공장 내 샘표스페이스에서 열리는 ‘이름 없는 이름-나는 나를 상상할 수 있습니까?’전은 세상에서 ‘내 이름의 자리’를 찾아보는 공장 노동자들의 꿈을 보여준다.

경기도 이천에 자리한 샘표식품공장 문을 열자마자 짭짜름한 장 냄새가 물씬 풍겨오는 듯하다.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한 시간 남짓 떨어진 곳, 이천 지역의 유일한 대안공간인 샘표스페이스가 이 공장 안에 있다. 간장공장과 갤러리라니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한 쌍 같지만, 이번 전시는 젊은 예술가들의 ‘동네 친구 만들기 프로젝트’라고 한다. 즉 예술작품의 소재를 향유 계층의 삶과 동떨어진 곳에서 찾는 게 아니라 일상 속, 즉 공장 구성원들 속에서 찾는 것이다.

샘표공장 노동자들과 독립예술가 최영숙, 배성미의 협업으로 열린 이번 전시에서는 공장 노동자들의 인터뷰를 영상작품으로 재구성한 ‘당신은 누구십니까?’,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만든 명함 모자이크 ‘함께하면 웃을 수 있을까’, 노동자들의 일상과 꿈을 담은 설치작업 ‘점령의 노하우’ 등이 소개된다.

작품 제작에 동참한 이들은 샘표공장에서 십수 년간 근무해 온 노동자들.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동요를 배경으로 15분 분량으로 편집된 영상 작업에서 이들이 들려주는 일상은 고단하다. 오전 4~5시에 일어나 아이들 밥 차려 주고, 간단히 몸단장하고 나오면 오전 6시 30분. 통근버스를 타고 공장에 와서 비로소 아침을 먹고,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일한다. 쳇바퀴 도는 일상이지만 일할 수 있는 내 자리가 있기에 인터뷰하는 이들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넘친다.



전시장에는 이번 전시에 참여한 분들의 인터뷰가 동영상으로 재생되고 있다. “평생 30~40만 원 하는 비싼 옷은 딱 두 번 사 봤다”는 남우경 씨나 “예전엔 메이커 옷집 앞은 지나가질 않았어. ‘저런 건 내 게 아니야’ 하고 살 생각도 못했는데, 요즘은 ‘아이고 입고 싶다, 예쁘다’ 하면서 만져보고 가” 하고 수줍게 털어놓는 인혜순 씨의 인터뷰엔 하고 싶은 것 참고, 아끼며 살아온 우리네 어머니 모습이 담겨 있어 애틋하다.

또한 “1984년 용역직으로 공장에 들어왔다가 9년 만에 정식 직원이 됐을 때 가장 기뻤어” 하고 회고하는 배필금 씨나 “특별보너스 받아서 김치냉장고 샀을 때가 가장 좋았지”라는 이양자 씨의 말을 들으며 일상 속에서 소박한 기쁨을 찾는 이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게 된다.


이렇게 인터뷰로 취합된 노동자들의 꿈과 일상은 각자의 이름과 개성을 담은 명함의 모티브로 도입됐다. 손바닥만한 종이 한 장에 지나지 않지만, 자기 이름과 연락처를 담은 명함을 난생 처음 손에 쥔 노동자들은 더없이 즐거워했다. 이들의 명함은 전시 오픈식 날, 충무로 샘표 본사에서 근무하는 사무직 종사자들의 명함과 함께 벽에 부착되어 색다른 모자이크를 이뤘다. 1월 27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관람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주말과 공휴일은 휴관. 문의전화 02-3393-5500.



인터뷰를 토대로 제작된 색다른 명함들. 
특별보너스로 김치냉장고를 샀을 때 가장 기뻤다는 이양자 씨의 이야기에서 착안한
김치냉장고 문양의
명함(왼쪽)과, 자녀들과 함께 활기차게 살자는 뜻을 담은 인혜순 씨의 명함(오른쪽).


샘표공장 노동자들은 명함 대신 명찰을 늘 패용하고 살아간다. 공장 직원 161명 전원의 명찰을 액자로 만들어
벽에 붙인 설치작품 ‘모두의 기념품’ 앞에 선 샘표공장 노동자가 자신의 이름을 찾아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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