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취재기사 | 칼럼/인터뷰

대추리 들판의 ‘야릇한 흰 공’ 찍어온 사진가 노순택

by 야옹서가 2006. 5. 13.
 

[미디어다음/2006. 5. 13] 평택 대추리 황새울 들녘에, 30미터 높이의 거대한 흰 공이 우뚝 서 있다. 대추리 어느 곳에서나 도드라지게 눈에 뜨는 공의 정체는 ‘레이돔’, 주한미군 캠프 험프리 소유의 돔형 레이더다. 햇수로 3년간 이 공의 정체를 추적하며 대추리 풍경을 찍은 다큐멘터리 사진가 노순택(37)을 만났다.
노순택은 ‘분단의 향기’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분단 현실에 기인한 여러 사건들을 사진으로 기록해왔다. 2004년 초 대추리를 방문한 것도 그런 작업의 연장선상에서였다. ‘평화유랑단’을 이끌고 대추리에 온 문정현 신부의 다큐멘터리 사진작업을 위해 동행했다가, 자연스럽게 평택 미군기지 이전 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대추리 농민들의 일상을 사진으로 기록하면서 유독 눈에 띈 것이 바로 들판 한가운데 우뚝 선 ‘흰 공’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야릇한 공이었지만, 의식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하니 대추리 어디서나 이 공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농민과 전투경찰이 대치하는 시위현장, 쌀과 보리가 자라나는 논밭, 심지어 외양간에서도 흰 공은 집요하게 등장했다. 수소문한 끝에 알아낸 그 조형물의 정체는 특수재질로 보호막을 씌운 돔형 레이더, 즉 ‘레이돔(radome)’이었다. (레이돔은 레이더(radar)와 돔(dome)의 합성어다.)


노순택이 레이돔의 정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만난 한 군사전문가는 “겉으로 보기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곳처럼 보이지만, 평택은 미 육군에게 용산 미8군 기지보다 더 중요한 곳”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평택에서 통신정보수집 항공기를 운용하는 주한미군에게, 이곳은 중요한 통신감청의 핵심기지이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이 무려 8조 원 이상의 막대한 비용을 들여 용산과 경기 북부 일대 미군기지를 평택으로 이전하려는 데는 이와 같은 이유가 있다. 그리고 한국 정부는 미군기지 이전에 필요한 천문학적인 비용의 대부분을 '국책 사업'이라는 명분 아래 떠안았다.


하얗게 빛나는 보호막에 싸인 거대한 레이돔은, 스쳐지나는 사람들에게는 ‘야릇한 흰 공’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노순택은 이 ‘흰 공’의 존재가 평택 미군기지 이전을 둘러싼 사람들의 인식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인식하지 못했을 때는 아무렇지 않지만, ‘흰 공’에 얽힌 내막을 알고 나면 마음 편히 바라볼 수 없는 것처럼, 대추리와 미군기지 이전의 문제 역시 그러하다. 


“일단 의식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를 은근히 억압하는 흰 공처럼, 한국에서 주한미군의 존재도 그런 게 아닐까 싶었어요. 대추리 문제를 직접적으로 호소하기보다, 저 공을 통해 은유적으로 대추리 농민들의 문제를 보여주려 했죠.”  


피 흘리며 논바닥에 쓰러진 농민들, 무참히 헐린 대추초등학교 등 노순택이 언론 매체에 송고했던 일련의 보도사진보다, ‘흰 공’이 도처에 보이는 풍경 사진이 더 충격적인 이유가 있다. 그 충격은 보도사진을 볼 때보다 느리게 다가오지만, 한층 섬뜩하다. 이 사진을 통해 ‘기이한 현실’을 너무나 당연히 받아들이는 우리의 얼굴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뭇 생명을 키워내는 논밭에, 남의 나라 군사 시설이 들어서서 마을의 이정표 역할을 하는 현실은 얼마나 기이한가. 노순택의 사진은 이런 비일상적 풍경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일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의 뒤통수를 슬그머니 후려친다. 

 


노순택은 보도사진을 찍을 때와는 다른 각도에서 대추리 풍경을 담는다. 사진에 등장하는 흰 공의 모습은 위압적인 군사 시설이라기보다, 때로는 애드벌룬 같고, 때로는 골프공 같다. 전경들의 머리 위에 거품처럼 둥실 뜬 흰 공이나, 포크레인의 삽 부분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흰 공은 일종의 블랙코미디이다.

 

 

 

 


들판에 쥐불을 놓는 농민의 손놀림이, 저 멀리 실루엣으로 변한 조그만 흰 공을 금세 후려칠 듯 힘차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의 비행장 건설로 처음 집과 땅을 빼앗기고, 한국전쟁 후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1952년 들이닥친 미군들에게 두 번째로 삶의 터전을 잃은 대추리 농민들은 세 번째로 떠돌이 신세가 될 운명에 처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순택은 농민들이 희망이자 대안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노순택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대추리 들판에 선 ‘수상한 흰 공’에 대응할 ‘희망의 공’을 하나 만들었다. 바로 대추리 농민들의 사진 600여 장을 모자이크해 만든 가상의 공이다. 그가 사진 모자이크로 만들어낸 거대한 공은, 농민들에게 거는 희망의 간절한 표현인 셈이다. 


“대추리에서 일일사진관을 연 적이 있어요. 농성 현장에서 그분들을 많이 찍긴 했지만, 정작 그분들이 찍히고 싶은 모습을 찍었는가 생각하게 됐죠. 그분들을 싸움의 공간으로 몰아넣은 국가 현실 앞에서 분노하는 모습만 담았던 것이 아닌가 싶고…. 그래서 작년 겨울에는 아예 한 달 동안 온 가족이 대추리에 살면서 ‘황새울 사진관’을 열었어요. 마을 분들이 필요로 하는 영정사진, 증명사진을 찍어 드렸죠.”


드문드문 박힌 ‘흰 공’ 사진과 함께 모자이크된 주민들의 표정은 그들이 겪어온 파란만장한 삶만큼이나 다채롭다. 누군가는 카메라를 수줍게 응시하며 함박웃음을 짓고, 누군가는 분노하며 ‘주한미군 철수’ 구호를 외친다. 그 속에 작가의 딸 노을(7)이도 있다. 노을이 역시 아빠가 대추리에 연 사진관에서 반사판을 들고 사진 찍는 걸 도우며 잠시나마 대추리 주민으로 지냈다. 대추리의 희망과 좌절을 담은 모자이크 속에서, 활짝 웃는 농민들의 숫자가 좀 더 늘어나는 것이 노순택의 바람이다. 


  이번 전시는 ‘얄읏한 공’(‘야릇한 공’이 아니다)이란 제목으로 광화문 신한갤러리에서 5월 23일까지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대추리 들판의 레이돔을 닮은  뻥튀기를 하나씩 먹어 없앨 수 있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개인의 힘이 하나둘 모일 때 그 견고한 ‘흰 공’도 물러나게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담은 ‘뻥튀기 퍼포먼스’다. 관람 문의는 02-722-8493, 일요일 휴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