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나/ 2006년 여름호] 아차산역 근처에 위치한 무용단 ‘댄스씨어터 온’의 지하 연습실. 왈츠 풍 연주곡에 맞춰 3인무를 추는 남성 무용수들 사이로, 안무가 홍승엽(44)의 날카로운 지적이 쏟아진다. “죽어가는 사람이 살려고 올라오는 장면인데, 술 취한 사람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야.” “걸음에 체중이 안 실리네, 체중, 체중, 체중!”
전용 의자에 앉아 손짓으로 움직임을 지시하던 홍승엽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는가 싶더니, 급기야 무용수들 앞으로 나선다. 느슨한 삼각 대형을 이뤄 흐느적흐느적 춤추던 무용수들이, 추가된 꼭짓점을 중심으로 갑자기 긴장한다. 그가 춤추며 두 팔을 솟구쳤다 툭 떨어뜨릴 때, 안무가 홍승엽은 사라지고, 죽음과 삶 사이에서 휘청대는 익명의 인간만이 남는다. 리듬을 타고 분방하게 움직이는 저 단단한 몸은, 그 옆에 선 20대의 풋풋한 몸보다도 더 아름답다.
“무용 공연을 직접 보지 않고 비디오로 심사하는 건 현장예술가에게 모욕”이라며 2004년 올해의 예술상 수상을 거부해 파란을 일으켰던 ‘댄스씨어터 온’ 대표 홍승엽. 공학도에서 무용가로, 다시 안무가로 변신을 거듭해온 그는, 웃음과 철학적 사유를 아우른 몸의 언어로 관객과 소통해왔다. 그러나 홍승엽은 탁월한 안무가 이전에 누구보다 ‘춤꾼 기질’이 강한 무용가다. 지금도 막, 러닝셔츠에 헐렁한 7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몸을 풀다 나온 참이다.
무병 앓듯 찾아온 춤의 열정
처음부터 무용가를 꿈꿨던 건 아니었다. 경희대 섬유공학과 2학년 재학 중, 신 내림처럼 갑작스레 찾아온 춤에 대한 열망은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어렸을 때부터 춤을 춘 것도 아니고, 특별한 계기도 없었다.
“오래 전부터 무용을 한 사람들은 그런 느낌을 모르겠지만, 뒤늦게 시작한 사람들은 스스로 알아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 몸이 음악과 함께 움직이고 싶어 하고, 그런 욕망이 내 속에서 계속 나오니까. 무병(巫病)하고 다를 게 없는 거죠.”
6개월이 넘도록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을 설치며 고민하다, 죽을 각오로 무용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복수 전공 제도가 없었기에, 공대 선택 과목 대신 무용학과 전공 과목을 들었다. 학부를 마치는데 1년이 더 걸렸지만, 덕분에 동대학원 무용과에 바로 진학할 수 있었다. 그는 현대무용을 시작한지 불과 2년 만인 1984년 제14회 동아무용콩쿠르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1986년 제8회 대한민국무용제 연기상을 수상하면서 무용수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세계 무대를 겨냥한 춤을 추고 싶었던 그에게, 남들이 짜 주는 안무는 성에 차질 않았다.
“내가 무용수로 있는 동안 훌륭한 안무가들에게 좋은 작품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면 안무를 시작하지 않았을 거예요. 처음엔 ‘내가 하면 잘 할 수 있겠다’ 해서 시작했지만 점점 ‘이건 내가 해야 되는 일이구나’ 하는 소명의식을 갖게 되었죠.”
1992년 유니버셜 발레단에 입단해 3년간 몸담은 것도, 척박한 한국 무용계의 현실에서 전문 무용단을 제대로 만들고 꾸려나가는 데 필요한 경험을 쌓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1993년 국내 최초로 직업 현대 무용단을 지향하는 ‘댄스씨어터 온’을 결성했다.
전략적인 레퍼토리 공연 시스템
하지만, 아직까지 단원들에게 월급 한 번 제대로 주지 못했다. 최근 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 전문 단체 지원 대상으로 선정돼, 3년간 매년 1억 원씩 지원받으면서 그나마 교통비라도 줄 수 있게 됐다. 그만큼 무용계 현실이 어렵다.
“‘댄스씨어터 온’은 아직 직업 무용단이 아니에요. 다만 월급을 못 받을 뿐, 직장 시스템과 똑같이 돌아가는 프로페셔널 단체지요. 다른 무용 단체 연습시간을 체크해보면 공연 있을 때만, 그것도 오후 8시 넘어서나 시작하죠. 공연이 주가 아닌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1년 내내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연습합니다. 대신 끝나는 시간은 칼 같아요. 단원들이 부업을 해야 하니까요.”
한국에서 현대 무용 공연은 일회용품 취급을 받는다. 작품 한 편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몇 달을 공들여 준비하지만 정작 공연이 끝나면 그뿐, 한 번 무대에 올랐던 공연은 사장되고 만다. 그러나 홍승엽은 이러한 무용계의 풍토에 반기를 든다. 성향이 다른 다양한 작품군을 번갈아 발표하며 이른바 ‘레퍼토리 시스템’을 구축해 온 것에는 이유가 있다. 작품의 다양성과 안정성을 확보함으로써, 언제 국내외 어디에 내놓아도 경쟁할 수 있도록 무용단의 자생력을 기르고자 한 것이다.
“‘댄스씨어터 온’은 모던 댄스 컴퍼니보다 컨템포러리 발레 컴퍼니에 가까워요. 안무 구상 단계부터 세 가지 정도로 방향을 잡습니다. 추상적인 작품, 아주 연극적인 작품, 추상적인 내용이면서도 장면은 굉장히 구체적으로 설정한 작품. 최근에 저희 공연을 본 경험이 있는 관객들이 차기작을 봤을 때,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세 가지 성향의 작품을 번갈아가면서 창작하죠.”
이를테면 <빨간 부처>나 <다섯 번째 배역> 같은 작품은 문학 작품을 재해석한 것이고, <싸이프리카>라던가 <달 보는 개> 같은 작품은 그 자체로 추상적인 작품들이다. 1999년 이전이 습작기였다면, 이후 작업은 비로소 관객들과 함께 끌고 갈 수 있는 레퍼토리 시스템 안에 편입된 작품들이다. 그리고 <싸이프리카> 이후 2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 <아큐(阿Q)>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유쾌하게 풍자하다
루쉰의 소설 『아Q정전』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아큐>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표현하는 대명사로 인용된다. 작품의 메시지 못지않게 공연의 재미를 중시하는 홍승엽은 무용수들의 동작에 강약의 세기를 조절하는 상징적인 소품들을 투입해 관람객의 시선을 잡아끈다. 장미와 고깔, 칼 등의 소도구가 그것이다.
무용수들은 상대방을 어루만지며 부드러운 포옹을 하다가, 갑작스레 상대방의 등과 배에 장미를 꽂는다. 장미는 유혹하면서 동시에 상대방에게 날카롭게 상처 입히는 도구다. 가시에 찔린 무용수들은 허우적거리다가, 자신의 고통을 전가할 다른 이를 만나면 다시 그의 몸에 장미를 사정없이 내리꽂는다. 닫힌 세계 속의 어리석음을 상징하는 ‘고깔’의 이미지도 어지럽게 넘나든다. 특히 고깔은 홍승엽이 관심을 갖는 사이버 세상과도 맞물린 장치다.
“영화 잡지에서 ‘6월의 뱀’이라는 일본 영화의 스틸 컷을 한 장 봤는데 그게 고깔 이미지였어요. 거기서 착안했죠. 고깔은 사이버 세상이에요. 바깥에서 나를 보는 사람은 내 얼굴이 완전히 가려 보이지 않고, 내가 바깥을 보고 있을 때에는 왜곡된 세상이 보이죠. 춤에서도 그런 식으로 연출이 돼요. 현실과 가상을 오가는 과정에서 고깔 쓴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들어요. 누군가 나를 이 울타리 속에 집어넣고, 가상현실의 고깔을 씌워 나도 모르게 도살해 버리죠. 이를테면 어리석음에 의해 희생되는 사람들인 거죠.”
어리석음이라는 주제가 무겁게 들리기도 하지만, 홍승엽은 굳이 무게를 잡기보다 동작과 동작 사이에 자잘한 재미를 제공해 관람자의 시각을 붙든다. 여기에 경쾌한 왈츠부터 클래식 음악, 심지어 트로트 가수 나훈아의 ‘갈무리’에 맞춰 시체와 춤을 추는 남성 3인무까지 등장시켜 흥미를 유발한다. 특히 극중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는 음악은 80퍼센트 이상을 새로 작곡한다. 덕분에 해외 공연을 나가면 관람객들이 음악 시디를 어디서 구하냐고 보채기도 한단다.
“이 장면에 이런 음악이 필요하겠다 싶으면, 연습할 때는 비슷한 곡으로 연습하되 실제 무대에서는 거의 대부분 새로 작곡한 곡을 쓰는 걸 원칙으로 해요. 몇몇 특별한 장면에서만 원곡을 쓰죠. 해외공연을 위해서 작품을 가지고 나가면 저작권 때문에 골치를 썩을 수밖에 없어요. 앞으로 5년 뒤, 10년 뒤에도 좋은 평판이 나오려면 남의 음악을 쓰고 싶지 않고, 저희 작품만을 위한 음악을 만들고 싶은 거예요.”
춤을 위해 춤추기를 접더라도
이래저래 많은 품이 드는 무용단을 유지하기 위해 홍승엽 씨는 다른 단원들보다도 더 많이 일한다. 단원들이 연습을 파하고 돌아가는 오후 6시 이후에도, 그는 무용 과외를 비롯해 안무 계획, 행정 작업 등 소소한 일에 정열을 분산해야 한다.
“단원들이 덜 고생하면서 작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지원이라도 주어진다면 좋겠죠. 단, 구걸하듯 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성과 관객의 신뢰를 바탕으로 해서 말입니다. 그런 날이 오면 무용단장 자리도 내놓을 수 있어요. 난 예술 감독을 하고, 안무만 할 수 있으면 되니까요.”
한 달의 연습 시간만 주어지면, 기존 레퍼토리를 활용해 한 도시에서 네 번까지는 초청공연을 소화해 낼 수 있다며 눈을 빛내는 그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작품의 수준은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인프라가 부족해 꿈을 접을 수밖에 없는 수많은 동료와 후배를 바라보며, 그가 직접 춤추는 대신 전략적 안무가로 돌아서야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홍승엽 | 안무가, 무용가. 1962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희대 재학 중 현대무용을 시작했고, 1998년 동 대학원에서 무용학을 공부했다. 1984년 제14회 동아무용콩쿠르 대상, 1986년 제8회 대한민국무용제 연기상을 수상했다. 1993년 ‘댄스씨어터 온’을 창단하면서 제18회 서울국제무용제 안무가상, 1999년 제10회 일본 사이타마 국제콩쿠르 특별상 등을 수상하며 안무가로도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2000년 9월 리옹 댄스 비엔날레에 참가한 <데자뷔>, <달 보는 개>는 5회 연속 매진을 기록하며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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