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를 읽다가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의 개인도서관 ‘고양이 빌딩’ 사진을 보았기 때문이죠. 지하 1층, 지상 3층의 도서관 외벽 전체를 까맣게 칠하고, 좁고 길쭉한 계단 벽에 거대한 검은 고양이 얼굴을 그려넣은 고양이 빌딩은 부럽기 그지없었죠.
“천국은 다만 거대한 도서관이 아니겠는가”라 했던 바슐라르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고양이 빌딩’은 책과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갖고 싶은 동경의 공간 아닐까요? 그래서 고양이 빌딩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공공도서관이 아니므로, 내부는 당연히 일반인에게 공개가 되지 않습니다. 빌딩 외관을 둘러보면서《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에 수록된 세노 갓파의 부감도와 연결시켜 상상할 따름이었지만, 흐릿한 흑백사진만 보면서 궁금해하다가 고양이 빌딩의 위용을 보니 답답했던 마음이 확 풀리더군요.‘언젠가는 꼭 나만의 고양이 빌딩을 만들어야지 ’하고 결의를 다지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저렇게 거대한 고양이 그림이 동네 한가운데 있으면 이웃 주민들의 항의를 받지 않았을까 싶지만, 아직까지 저 모습 그대로인 걸 보면, 저 사람은 원래 저렇게 엉뚱하겠거니...하고 포기한 것인지, 그냥 엉뚱함조차도 다 포용할만큼 마음이 너그러운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건물의 뒷모습입니다. 약간 비탈진 내리막길의 맨 아래쪽에 있어요.
다치바나 다카시는 애묘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고양이 빌딩에 고양이 얼굴을 그리게 된 것도, 그냥 '고양이를 좋아하니까'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라고 하네요. 너무 귀여워서 이질감이 느껴지는 고양이 얼굴보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고양이의 표정을 찾다 보니, 지금처럼 약간은 뾰로통한 모습의 고양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 되는 100권》을 보면 미야자키 하야오와의 인연을 언급하면서, 그와의 친분 때문에 애니메이션 성우로 출연했다고 밝히는데, 바로 ‘귀를 기울이면’에 등장하는 도서관 사서인 시즈쿠의 아빠 역할입니다. 책 1권을 쓰기 위해 대략 1미터 높이의 책을 사서 독파한다는 그의 일생과 잘 어울리는 배역이라 생각됩니다.(참고로 이 애니메이션에도 고양이가 등장해서, 시즈쿠가 또다른 세계와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를 읽어보면 그가 지금과 같은 도서관을 짓기 전, 그러니까 아직 가난한 청년 자유기고가일 때 책꽂이 대용으로 썼던 사과상자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고양이 빌딩처럼 번듯한 도서관을 만든 다음에도, 그 사과상자를 버리지 않고 도서관 안에 두었다는 글을 읽고 음...그렇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유명인사라면 누구나 무명 시절을 지나게 됩니다. 그리고 성공하면 대부분 그 시절을 잊고 싶어하지요. 지금은 저명한 저널리스트가 되었지만, 다치바나 다카시에게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 막막한 청년기가 있었습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직장생활 하다가, 책을 더 읽고 싶어서 회사를 그만두고, 닥치는대로 여러가지 글을 쓰면서 살던 시절이지요. 물론 그때의 그 경험이 지금처럼 잡학가이자 다작가인 그를 만들었겠지만요.
다치바나 다카시는 자신도 지나온 무명의 시기-도대체 저 사람이 무얼 하면서 저만큼 성장했는지 알 수 없는 시절을 가리켜 ‘수수께끼의 공백시대’”라고 한 바 있습니다. 이미 번듯한 고양이 빌딩을 가졌음에도 그 사과상자를 버리지 못하는 건, 그것이 다치바나 다카시에게는 고난의 시절을 추억하는 물건이기에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검은 고양이의 집 '셰 다치바나'라는 글귀와 함께 주소가 적혀있는 문패입니다. 고양이 빌딩은 일본 도쿄 분쿄구에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꾸준히 할 때, 그리고 그것을 오랫동안 지켜나갈 의지를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제 삶을 돌이켜봤을 때, 후회하지 않을 것 같네요. 고양이 책으로 나만의 작은 책꽂이를 하나하나 채워가면서, 고양이 빌딩의 추억을 돌이켜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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