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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원의 길고양이 통신]/[고양이 여행] 한국

난민보트 탄 길고양이, 따뜻한 우정

by 야옹서가 2009. 3. 25.

아슬아슬, 좁은 환풍기 위에 고양이 네 마리가 몸을 기대고 휴식을 취한다. 발아래 드넓게 펼쳐진 나무덤불은 잔잔한 바다를 닮았다. 갑작스레 펼쳐진 초록빛 바다에 홀려 고양이가 있는 쪽을 본다.

혹시나 땅바닥으로 떨어질세라 몸을 붙여 앉은 고양이들은, 조그만 난민보트에 몸을 싣고 바다를 떠도는 것처럼 보인다. 옹색하게 붙어앉은 모습도 그렇지만, 눈치 보며 여기저기로 도망 다니다 삶을 마감하는 길고양이 신세를 생각하면, 나라를 잃고 떠도는 난민 신세에 견주어도 크게 어색함이 없을 듯하다.

그러나 이것도 인간의 관점에서 고양이의 형편을 상상하는 것일 뿐이다. 정작 당사자인 길고양이의 표정은 천연덕스럽기만 하다. 친구들과 나란히 햇볕을 나누는 즐거움을 생각하면, 이 정도 비좁음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는 표정이다.


고양이 한두 마리가 환풍기 위에 올라간 모습을 가끔 보곤 했지만, 이렇게 대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아무리 높은 곳이 취향이라고는 하지만, 한 마리가 올라가기 딱 좋은 정도의 공간인데 불편하지 않을까? 그럼 제일 서열 높은 고양이가 편한 자리를 차지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

그런데 네 마리 고양이 중에 제일 편안하게 있는 녀석은 뜻밖에도 제일 어린 노란둥이 아깽이였다. 그 좁은 공간에서도 혼자 식빵 자세로 편안히 앉아있었으니.  바로 옆 카오스무늬 고양이는 비좁은지 다리 한쪽과 꼬리가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환풍기 가장자리에 걸쳐 있다. 이들 무리에서는 제일 어리고 약한 고양이가 배려를 받는다.


때론 길고양이에게도 마음에 드는 장소가 서로 겹칠 때가 있다. 내가 먼저 좋은 자리를 차지하지 않으면, 남에게 뺏겨버릴 상황. 이런 상황이 되어보아야 고양이는 누가 진짜 친구인지 파악할 수 있다. 좋은 자리 하나를 놓고 네 마리가 싸워서 제일 강한 고양이가 이기면, 행복해지는 건 한 마리뿐이다. 하지만 좁고 불편해도 서로 몸을 조금씩 붙이면 한 마리 더, 또 한 마리 더 앉을 자리가 생긴다. 나누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네 마리가 함께 행복해지는 길이 열린다. 


흔히 길고양이에겐 서열다툼만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천천히 시간을 들여 바라보면 고양이 사회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고양이 사이에도 나눔과 배려가 있다. 이날의 햇빛 나눔만 해도 그렇다. 비록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안심할 수 있는 '내 집'을 갖지 못하고 쫓겨다니지만, 길고양이는 자신이 가진 보잘것없는 재산만으로도 따뜻한 나눔의 기적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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