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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원의 길고양이 통신]/[고양이 여행] 한국

<길고양이가 있는 따뜻한 골목>을 위해

by 야옹서가 2006.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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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불이 나서 단 한 가지 물건만 갖고 나올 수 있다면, 뭘 선택할까? 아마 길고양이 사진이 저장된 컴퓨터를 짊어 메고 뛰쳐나오지 않을까. 민언련 사진 강좌에서 ‘내겐 소중한 것들’을 주제로 포토스토리를 만들면서 이런 공상을 해봤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겠지만 가장 소중한 건 ‘대체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사람을 제외하면 내게는 길고양이 사진이 그렇다. 비슷한 골목, 닮은 고양이를 찍을 수는 있겠지만, 길고양이를 찍으러 다녔던 그때 그 순간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시간이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 것처럼, 길고양이 역시 그곳에 머물러 있지 않다.


사진에 의미를 두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20대 중반까지 내게 사진은 그림을 보조하는 수단 이상은 아니었다. 첫 수동카메라였던 니콘 FM2를 장만한 것도, 슬라이드 필름으로 그림 사진을 찍으려면 수동카메라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3학년 때 선생님을 모셔다가 동기들과 함께 사진을 배우기는 했지만, 그때 찍은 사진들을 보면 별 감흥이 없다. 주제의식 없이 되는대로 눈에 띄는 것들을 찍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주제를 정해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이 2001년 3월 서울시청 별관에서 하는 시민강좌를 들으면서부터다. 밥벌이와 무관한 전공으로 대학원을 막 졸업하고 나니, 학원 강사 아니면  단기 아르바이트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동안 소중하게 여겼던 일들이 정작 사회에서는 쓸모없는 짓거리로 치부되는 현실이 씁쓸했다. 나는 마음이 휑해지면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잡념이 생길 틈을 주지 않는데, 그때 강좌에 등록한 걸 보면 아마 전자의 방법을 선택한 것 같다.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첫 번째 길고양이 사진도 이 무렵 찍었다. 2001년 4월경이었나. 주로 철거 대상 지역의 폐가를 찍으며 다녔는데, 교실전에 낼 사진을 찍으려고 서소문 뒷골목을 훑으면서 옛날 문짝이나 오래된 창틀을 찍다가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누군가 쓰다 버린 캐비닛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곳. 아직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철거 직전의 빈 집 같은 냄새를 풍기는 곳. 그 골목길 한가운데, 버려진 물건처럼 무심한 얼굴의 길고양이들이 도사리고 앉아 있었다. 그 무심함이 어쩐지 마음을 끌어 사진을 찍었다. 50mm 단렌즈밖에 없어서 코앞으로 바짝 다가가 찍어야 했는데도, 녀석들은 꿈쩍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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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만 해도 길고양이는 내게 골목 사진에 스윽 지나가는 보조 출연자 정도의 비중이었던 것 같다. 내 머릿속에 각인된 건 '골목 사진'이었지, '길고양이 사진'은 아니었으므로, 필름을 인화한 뒤에는 그 사진을 찍었는지조차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2002년 7월경 ‘밀레니엄 고양이’로 부르는 고양이를 만나면서, 언제부턴가 길고양이를 계속 찍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사진을 정리할 때마다 길고양이가 출몰하는 빈도도 점점 늘어갔다.


2001년에 찍었던 서소문 골목길의 길고양이 사진을 다시 찾아본다. 흑백 사진 속에 정물처럼 반듯하게 고양이들이 앉아 있다. 그제야 내가 왜 길고양이를 찍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버려진 것에 마음을 빼앗긴다. 한때 쓸모 있는 것으로 아낌을 받았으나 이제는 폐기처분되기만을 기다리는 사물들과, 한때 누군가의 집에서 사랑받고 살았으나 이제 길 위의 생명이 된 길고양이는 서로 참 많이 닮았다. 그렇게 버려진 사물과 생명의 모습들 속에서 내 모습을 발견한 것 같다. 시간이 흐른 뒤에 우연히 발견한 사진은 이상하게 애틋한 감정을 불러온다. 특히 사진을 찍을 당시에는 아무 생각 없이 바라봤던 풍경에서 뒤늦게 의미를 발견할 때 더욱 그렇다.

생각해보면, 소중한 걸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지.
길고양이 이야기 카테고리를 새로 만든 건, 그 이유를 차근차근 풀어 써보고, 길고양이들의 역사를 정리하기 위해서다.  그 전까지는 길고양이를 언제 어느 장소에서 발견했다는 정도의 기록밖에 남기지 못했다. 예컨대 밀레니엄 고양이의 경우, 아기고양이 때의 모습과 1년 뒤 새끼를 데리고 나타났을 때의 모습이 확연히 다르다. 하지만 길고양이가 발견된 장소와 시간 순서에 따라 저장만 하다보니,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한눈에 보기 힘들었다. 길고양이의 생존 주기가 3년 안팎인만큼, 이제는 그간의 사진을 묶어 봐도 될만큼 시간이 흐른 것 같다.  

 

글과 사진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지 않는다면, 이런 기록은 그저 단편적인 메모에 지나지 않게 된다.  예전 사진들을 다시 정리해서 글을 붙이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얼마 전 길고양이 전단지의 글을 윤문하면서, 그간 찍은 사진들로 길고양이에 대한 이해를 돕는 자료집을 만들면 전단지보다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남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 듣고 글로 정리해주는 일로 밥벌이를 하면서도, 정작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걸 정리하는 데는 소홀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블로그에서, 길고양이 관련 카테고리만큼은 ‘길고양이에 대한 온라인 자료집’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길고양이가 있는 따뜻한 골목'을 주제로 사진집을 만들어 보고 싶다. 이 제목은, 골목이라는 주제에 30여 년을 천착하다 작고하신 김기찬 선생님의 사진집 중에서 개가 등장하는 작품만을 모은 책 <개가 있는 따뜻한 골목>(중학당)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이 책은 절판되었지만, 나는 다행히 교보문고 온라인서점에서 재고분을 구했다. 내가 기록한 길고양이 이야기와 사진들도, 언젠가 강퍅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쓰일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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