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밀라의 기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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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묵은 아파트에 살다 보니,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구석구석 뜯어보면 성한 구석이 없다. 처음엔 황금빛이었다가 이젠 구릿빛으로 변한 손잡이는 헛돌기만 할 뿐 제대로 열리지 않고, 부엌 싱크대 서랍 레일이 망가져 툭 기울거나, 거실 천장의 형광등 커버가 느닷없이 추락하는 바람에 가슴이 철렁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고양이에겐 이렇게 낡은 집도 그저 새로워 견딜 수 없는 모양이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잠으로 보내는 녀석이지만, 깨어 있을 때면 집 구석구석을 탐색하며 소일하느라 여념이 없다. 책꽂이 위로 폴짝 뛰어올라 꼭대기에 쌓인 먼지를 털고, 방문을 열겠다고 앞발로 문짝을 긁어 생채기를 남기면서.
가끔 스밀라가 문 앞에서 벅벅 긁는 소리를 내면서 밖으로 나갈 때면, 열어주지도 않았는데 혼자 문을 열고 드나드는 게 신기하고 귀엽기도 해서 그냥 내버려두곤 했다. ‘저 녀석, 조그만 게 힘은 장사일세’ 하고 기특해하면서. 문짝 아래 사정없이 긁힌 자국을 제대로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루는 문 뒤에 숨어서 스밀라에게 장난감을 던져 슬슬 당기면서 유인하는 놀이를 하는데, 문짝 아래, 딱 고양이 키만한 높이에 어지럽게 긁힌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스밀라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때마다 조금씩 생채기가 난 모양이다. 흰색 페인트 아래 숨어 있던 나무 속살이 다 드러날 지경이다. 스밀라와 함께 산 지도 2년이 다 되어 가니, 2년 동안 쌓인 세월의 흔적이 문짝에 새겨진 빗금으로 남은 셈이다.
긁힌 문을 보노라니 언제 이렇게 긁어 댔나 싶어 어이없기도 하고, 한편으론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숫자를 셀 줄 모르지만, 스밀라는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암호로 집 곳곳에 흔적을 남기면서 나와 함께 살아온 시간을 표시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숫자가 없던 시절, 사람들이 나무나 뼈에 빗금을 그어 수를 헤아렸던 것처럼.
언젠가 문 뒤에 더이상 스밀라가 없을 때도, 문 아래 새겨진 빗금들을 보면 스밀라가 떠오르겠지. 좋아하는 사람이 땅콩 초코볼을 즐겨 먹는다는 말을 듣고선, 땅콩 초코볼만 보면 그 사람이 생각나는 것처럼, 낡은 집의 문짝을 볼 때마다 문 아래를 유심히 보게 되겠지. 만약 언젠가 내 집을 갖게 된다면, 문짝 아래 고양이 전용 출입문을 뚫고 싶다. 힘들게 문을 긁지 않아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반평생 세입자로 살아온 마당에, 집 장만은 요원한 일이겠지만.
2008.03.30 14:23
아무곳에나 발톱 가는 걸 보고
예전에 짜증 제대로 부렸는데..
그땐 스크래치 판 생각은 못했을 때라
의자를 몇 번이나 바꿨다죠? ㅋㅋ
2008.03.30 17:24 신고
스밀라도 처음엔 식탁의자 가죽 부분을 발톱으로 뜯곤 해서
낡은 의자를 갖다주고 거기서만 뜯게 했어요. 눈치가 빨라서
이젠 식탁 근처에 가도 기대기만 할뿐, 스크래치는 안하네요.
덕분에 오래된 식탁의자는 솜이 다 빠져나와서 너덜너덜...
2008.04.01 08:01
전 음악 듣는걸 꽤 좋아해서 오디오 시스템에 빠졌었어요. 그런데 맑음이랑 하늘이가 오고나서 집에 스크래쳐가 없으니까 회사에 다녀온 사이에 스피커를 스크래치 해놨더라구요. ㅠ_ㅠ 그래도 스피커 떔에 속상한것보다는 스크래쳐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구요. 한없이 귀여운 녀석들의 재롱에 함박웃음을 짓다가도 언젠가는 이별을 해야겠지 하는 생각이 늘 젤 밑에 있어요. 그래서 더 잘 해주고도 싶고 같이 시간을 더 보내야지 한답니다. 경원님 글에도 그런 감정이 느껴지네요 스밀라랑 오랫동안 행복하시길 바래봅니다.
2008.04.03 10:30 신고
스밀라는 화장실 갔다가 나올 때 책꽂이에 발톱을 갈곤 하는데요. 책꽂이에만 갈면 괜찮은데
가끔 발이 헛나가서 책표지까지 갈 때가 있어요ㅠ_ㅠ 처음엔 몰랐지만 나중에 보니 스밀라가
발톱 갈아서 생긴 자국이더라고요. 절판본이 아니라서 다행이었지만... 고양이와 함께 사는
사람들에겐 고양이가 남긴 자국도 다 나중에 추억이 되나 봐요. 요즘 스밀라를 보면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고, 거실에 있다가도 절 부르면서 방으로 들어오곤 해요. 사람을 어찌나 좋아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