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 17. 2001 | 최하림 시인이 1981년 펴낸 《김수영 평전》이 김수영 탄생 80주년을 맞아 재출간됐다. 20년 만에 증보된 평전의 분량은 사진자료 30여 컷, 아포리즘 ‘시와 말과 자유’를 포함해 4백32쪽에 달한다. 재발간된 평전은 김수영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모친의 증언에 많은 비중을 뒀다. 또한 만주 길림에서 함께 연극활동을 했던 임헌재, 거제포로수용소 동료 장희범, 서강에서 이웃에 살았던 김경옥, 그밖에도 박순녀, 김영태, 염무웅, 김철, 김우정 등의 증언이 보강됐다.
평전 속에 묘사된 김수영은 어렸을 때부터 병약했으며, 선린상고 재학시절에는 영어실력이 뛰어난 말없는 외톨이였다. 동기들 사이에서 ‘고독한 산보자’, ‘쇼펜하우어’ 등으로 불린 김수영은 집에서도 어두운 다락방에서 혼자 골몰해있길 즐겼다. 동경 유학을 떠나지만 대학 대신 미즈시나 연극연구소에 들어간 김수영은 귀국 후 길림에서 거주할 때 연극배우로도 활동했는데, 평소에도 흥이 나면 오른쪽 손을 번쩍 치켜올리고 연극 대사를 읊었다 한다. 해방과 함께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김수영은 1940년대 중반 모더니스트 시인들의 아지트였던 박인환의 헌책방 ‘마리서사’를 드나들며 1949년 김경린, 박인환 등과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펴내고 ‘신시론’ 동인으로 활동하는 등 모더니즘 계열의 초기시를 발표했다.
고독한 산보자, 쇼펜하우어, 김수영
그러나 6·25 전쟁 발발 후 북에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거제포로수용소 생활을 거치면서 그의 삶은 변화를 맞는다. 1951년 1월, 반공포로 진지와 친공포로 진지로 나뉜 거제수용소는 밤이 오면 습격과 린치가 성행하는 생지옥에 다름없었다. 이곳에서 김수영은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에 대해 회의하게 된다. 수용소에서 나와보니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내 김현경은 피난 수도 부산에서 김수영의 친구 이종구와 동거하고 있었다. 이때의 상황을 동료문인 박연희 씨는 “6·25가 한국민주주의를 타살하고 국민을 짐승적인 존재로 떨어뜨리고 김수영을 처용아비로 만들어버렸다”고 묘사하고 있다. 김수영과 아내 김현경은 애증으로 얽힌 사이였다. 그러나 김수영의 시나 산문에서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아내에 대한 비난과 조소는 경제논리와 적자생존의 원칙에 충실한 ‘생활인’의 전형이었던 아내의 모습을 빌어 당대 사람들을 비판한 것이기도 했다. 평화신문사에 재직하는 동안 생계 유지를 위해 명동 뒷골목을 뒤지며 미국잡지를 골라 잡지사에 소개하며 번역료를 타내 하루하루 살아가는 괴로움은 그가 일기에서 쓴 것처럼, 번역을 할 때가 ‘세상에서 제일 욕된 시간이라고 단정하고 있다’는 구절에서도 드러난다.
역사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고뇌의 시절을 겪은 김수영은 1955년경 아내와 재결합하고 성북동에서 서강으로 이사하면서 양계장을 시작하고 창작 활동에 전념했다. 변변한 효도 한번 못했던 김수영이 양계 일을 시작하면서 노모에게 병아리 1천 마리를 길러 선물하며 기뻐했던 모습이나, 병아리가 걸리기 쉬운 전염병의 종류를 꼼꼼히 기록한 산문은 그의 당시 생활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는 생활이 다소 안정되면서 1959년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간행했고, 제1회 시협(詩協)상을 수상했다.
‘참여시인’ 명성 뒤의 ‘생활인 김수영’ 면모를 소개
사람들에게 알려진 ‘참여시인’으로서의 김수영의 면모는 1960년 4.19혁명을 기점으로 두드러진다. 이 시기의 김수영은 거의 매일 술을 마신 다음날 아침 시를 쓰는 습관이 있었다. 쓰린 속을 달래며 시를 쓰면, 그 쓰라림이 시의 아픔으로 되살아나는 듯했다. ‘하…… 그림자가 없다’, ‘육법전서(六法全書)와 혁명’, ‘푸른 하늘을’ 등 이 시기에 쓴 작품들은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그의 갈망을 적극적으로 드러낸 수작이다. 특히 1970년대 민중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풀’은 김수영이란 이름과 참여시인이라는 평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도록 했다. 김수영이 1968년 6월 16일 교통사고로 사망하기 불과 4개월 전, 1968년 2월 28일부터 3월 28일까지 조선일보 지상에서 5회에 걸쳐 이어령과 벌인 ‘문학의 사회참여’논쟁은 오늘날까지도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다.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문화는 불온한 것이다’라는 명제를 획득한 의미있는 성과로 회자된다.
《김수영 평전》의 초판을 펴낼 1981년 당시 최하림씨는 “김수영의 콤플렉스와 격발성, 자유정신과 에고이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기적 해석이 뒷받침돼야 한다”며 평전의 필요성을 천명한 바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재현된 평전은 김수영의 문학적 변천과정 외에도 그의 여성편력, 아내에 대한 애증, 생계를 위해 미국잡지를 번역하고 양계장을 운영했던 일, 아들에게 쓴 편지 등 소소한 일화까지도 놓치지 않아 ‘참여시인 김수영’이전에 ‘욕망하고, 분노하고, 기뻐하는 인간 김수영’의 모습에 많은 비중을 뒀다. 《김수영 평전》은 자연인 김수영의 삶을 보다 깊이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자료로 남을 듯싶다.
평전 속에 묘사된 김수영은 어렸을 때부터 병약했으며, 선린상고 재학시절에는 영어실력이 뛰어난 말없는 외톨이였다. 동기들 사이에서 ‘고독한 산보자’, ‘쇼펜하우어’ 등으로 불린 김수영은 집에서도 어두운 다락방에서 혼자 골몰해있길 즐겼다. 동경 유학을 떠나지만 대학 대신 미즈시나 연극연구소에 들어간 김수영은 귀국 후 길림에서 거주할 때 연극배우로도 활동했는데, 평소에도 흥이 나면 오른쪽 손을 번쩍 치켜올리고 연극 대사를 읊었다 한다. 해방과 함께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김수영은 1940년대 중반 모더니스트 시인들의 아지트였던 박인환의 헌책방 ‘마리서사’를 드나들며 1949년 김경린, 박인환 등과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펴내고 ‘신시론’ 동인으로 활동하는 등 모더니즘 계열의 초기시를 발표했다.
고독한 산보자, 쇼펜하우어, 김수영
그러나 6·25 전쟁 발발 후 북에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거제포로수용소 생활을 거치면서 그의 삶은 변화를 맞는다. 1951년 1월, 반공포로 진지와 친공포로 진지로 나뉜 거제수용소는 밤이 오면 습격과 린치가 성행하는 생지옥에 다름없었다. 이곳에서 김수영은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에 대해 회의하게 된다. 수용소에서 나와보니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내 김현경은 피난 수도 부산에서 김수영의 친구 이종구와 동거하고 있었다. 이때의 상황을 동료문인 박연희 씨는 “6·25가 한국민주주의를 타살하고 국민을 짐승적인 존재로 떨어뜨리고 김수영을 처용아비로 만들어버렸다”고 묘사하고 있다. 김수영과 아내 김현경은 애증으로 얽힌 사이였다. 그러나 김수영의 시나 산문에서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아내에 대한 비난과 조소는 경제논리와 적자생존의 원칙에 충실한 ‘생활인’의 전형이었던 아내의 모습을 빌어 당대 사람들을 비판한 것이기도 했다. 평화신문사에 재직하는 동안 생계 유지를 위해 명동 뒷골목을 뒤지며 미국잡지를 골라 잡지사에 소개하며 번역료를 타내 하루하루 살아가는 괴로움은 그가 일기에서 쓴 것처럼, 번역을 할 때가 ‘세상에서 제일 욕된 시간이라고 단정하고 있다’는 구절에서도 드러난다.
역사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고뇌의 시절을 겪은 김수영은 1955년경 아내와 재결합하고 성북동에서 서강으로 이사하면서 양계장을 시작하고 창작 활동에 전념했다. 변변한 효도 한번 못했던 김수영이 양계 일을 시작하면서 노모에게 병아리 1천 마리를 길러 선물하며 기뻐했던 모습이나, 병아리가 걸리기 쉬운 전염병의 종류를 꼼꼼히 기록한 산문은 그의 당시 생활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는 생활이 다소 안정되면서 1959년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간행했고, 제1회 시협(詩協)상을 수상했다.
‘참여시인’ 명성 뒤의 ‘생활인 김수영’ 면모를 소개
사람들에게 알려진 ‘참여시인’으로서의 김수영의 면모는 1960년 4.19혁명을 기점으로 두드러진다. 이 시기의 김수영은 거의 매일 술을 마신 다음날 아침 시를 쓰는 습관이 있었다. 쓰린 속을 달래며 시를 쓰면, 그 쓰라림이 시의 아픔으로 되살아나는 듯했다. ‘하…… 그림자가 없다’, ‘육법전서(六法全書)와 혁명’, ‘푸른 하늘을’ 등 이 시기에 쓴 작품들은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그의 갈망을 적극적으로 드러낸 수작이다. 특히 1970년대 민중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풀’은 김수영이란 이름과 참여시인이라는 평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도록 했다. 김수영이 1968년 6월 16일 교통사고로 사망하기 불과 4개월 전, 1968년 2월 28일부터 3월 28일까지 조선일보 지상에서 5회에 걸쳐 이어령과 벌인 ‘문학의 사회참여’논쟁은 오늘날까지도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다.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문화는 불온한 것이다’라는 명제를 획득한 의미있는 성과로 회자된다.
《김수영 평전》의 초판을 펴낼 1981년 당시 최하림씨는 “김수영의 콤플렉스와 격발성, 자유정신과 에고이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기적 해석이 뒷받침돼야 한다”며 평전의 필요성을 천명한 바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재현된 평전은 김수영의 문학적 변천과정 외에도 그의 여성편력, 아내에 대한 애증, 생계를 위해 미국잡지를 번역하고 양계장을 운영했던 일, 아들에게 쓴 편지 등 소소한 일화까지도 놓치지 않아 ‘참여시인 김수영’이전에 ‘욕망하고, 분노하고, 기뻐하는 인간 김수영’의 모습에 많은 비중을 뒀다. 《김수영 평전》은 자연인 김수영의 삶을 보다 깊이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자료로 남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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