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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속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힘, 사랑-《자기 앞의 생》

by 야옹서가 2001. 9. 24.
Sep. 24. 2001 | 모든 사람은 어린 시절과 작별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그 시절을 보냈느냐에 따라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도 있고, 회복하기 힘든 고통으로 남을 수도 있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지정숙 옮김, 문예출판사)은 삶을 증오하고 마음을 닫는 대신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견디며 암울한 어린 시절을 떠나보내는 고아소년 모모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낸 수작이다. 1975년 메르뀌르 드 프랑스에서 출간된 이 책의 표지에는 초현실적인 드로잉이 그려져 있는데, 상상계와 암울한 현실을 오가는 모모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얼굴도, 따뜻이 안아줄 두 팔도 없는 여인의 다리 한편에 걸터앉은 어린아이의 옆모습은 담담하지만 쓸쓸하다. 여인의 모습이 불완전한 것은 한번도 어머니를 본 적 없는 모모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존재이기 때문이다. 에밀 아자르는 이 책으로 1975년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돈을 받고 창녀의 아이들을 맡아 기르는 전직 창녀 로자 부인의 집에서 살아가는 열 살배기 고아소년 모모의 삶은 우울하기 그지없다. 유태인으로 아우슈비츠에 끌려갔던 악몽에 시달리는 로자 부인이 쇠약해져 운신할 수 없게 되자 아이를 맡기는 창녀들도 점점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머니의 부재가 주는 상실감 역시 견디기 어렵다. 이런 현실의 암울함을 견디는데 가장 큰 힘이 되는 존재는 모모가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친구들이다. 새끼를 잘 돌보는 것으로 알려진 암사자를 불러내 얼굴을 핥게 하고, 어릿광대들과 함께 우울한 마음을 달래고, 세상에서 가장 힘센 경찰이 자신을 다독거린다고 상상하면서 모모는 마음의 위안을 받는다. 그의 상상 속 친구들은 모성애와 부성애, 따뜻함과 힘의 다른 모습이다. 모모가 가상의 친구들을 불러내는 장면은 흥미로우면서도 처연한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

상상과 현실을 오가며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는 고아 소년 모모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모모의 마음 한 구석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늙고 추해져 아무도 돌보지 않는 로자 부인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다. 이 사랑은 세속적인 미와 사랑의 기준을 떠나, 고통을 공유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절실한 감정이다. 모모는 길에서 우연히 알게 된 나딘느 부인을 따라가 영화 필름을 뒤로 되감는 장면을 구경하면서 로자 부인을 젊고 예뻤던 시절로 되돌리는 상상을 하며 기뻐하고, 모모가 너무 빨리 큰 아이가 되는 게 싫어 실제 나이인 14살보다 어린 10살로 속였다는 로자 부인의 고백에도 화를 내지 않는다. 암을 가장 두려워하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적어도 암에는 걸리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말해주는 모모는, 병원에 실려가 식물인간의 세계기록을 세우고 싶지 않다는 로자 부인의 말을 듣고 의사에게 안락사를 시켜줄 것을 간청하기도 한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힘센 뚜쟁이와 경찰이 돼서,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아파트 7층에서 혼자 울고 있는 늙은 창녀가 다시는 없도록 하겠다’는 모모의 다짐은 그가 처한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애정 표현이다.

상태가 악화된 로자 부인의 마지막 희망에 따라 아파트 지하실에 만들어놓은 ‘유태인 피난처’로 로자 부인을 데려가는 장면에서 이 소설은 절정에 달한다. 일본식 기모노를 입고 낡은 가발을 쓴 로자 부인이 숨을 거두자 시체가 부패되는 모습을 감추기 위해 화장품을 발라주고 향수를 쏟아 부으며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로자 부인의 곁에 머무는 모모의 모습은 충격적인 상황 묘사만큼 가슴을 메이게 한다. 시체 썩는 냄새에 지하실로 달려온 사람들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기겁할 때, 모모가 ‘살아있을 때는 냄새가 안 나니까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더니……’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에서는 사회에 만연한 무관심에 대한 비판을 읽을 수 있다.

구원하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사랑해야만 한다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고 가르친 하밀 할아버지, 여장남자 롤라 부인, 자수성가한 깡패 두목 은다 아메데씨, 이삿짐 나르는 일을 하는 왈룸바씨와 그 일행, 강직하고 현명한 캐츠 의사 등 개성있는 주변 사람들의 묘사와 더불어 모모의 말투 속에 담긴 위트가 책 읽는 맛을 더해주지만, 《자기 앞의 생》에서 무엇보다 돋보이는 건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마음을 닫지 않고 사랑을 갈구하며 외부의 대상에게 그 사랑을 돌린다는 점이다.

어떤 고통은 인간을 좌절시키기도 하지만, 그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고 함께 나누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둘 중에서 어떤 결말을 선택할지는 자신의 몫으로 남는다. 《자기 앞의 생》은 인간에게 이와 같은 선택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작이다. 자신을, 타인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모모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처럼 ‘사랑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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