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서점 2층에서 내려다 본 1층 책꽂이. 원래 동굴을 연상시키는 다락방 같은 구조였지만, 나선형 계단을 설치하면서 널찍한 2층 헌책방이 됐다. 집에서 전철로 20분 거리, 그나마 가까운 헌책방이 여기다. 한참 마음이 헛헛하던 무렵 중독된 것처럼 헌책방을 찾곤 했다. 인터넷서점 헌책방이 활성화되면서 예전처럼 자주 가진 않지만, 여전히 내게 헌책방은 단순히 헌책을 파는 곳 이상의 '무엇'이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내게 헌책방이 의미있었던 건 절판된 책을 구할 수 있어서라거나 책을 싸게 살 수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때문이다. 20대 중반에 만나 학창 시절을 공유했고, 졸업한 후에도 다들 헌책방 언저리에 머물던 '책 중독자들'이었는데, 이젠 그들을 만날 기회도 거의 없다. 드물게 열리는 헌책방 동호회원들의 결혼식에서나 가끔 볼까. 모임 게시판에서 '좋았던 그 시절'을 회상하는 글을 읽으며 옛 기억을 더듬을 따름이다. 애틋함이 사라져버린, 유효기간 지난 사랑을 추억하듯이 씁쓸한 마음으로.
지난 주말, 대학 동기 언니와 만나서 "나이 먹으니 마음 아플 일도 별로 없네요"하고 말하면서 웃었는데, 그래도 작정하고 말에 날을 세워 덤벼드는 사람을 만나면 아프긴 하다. 칼보다 날카로운 혀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사람을 맨손으로 막아본들 대처할 길이 없다. 그럴 때 상비약처럼 꺼내 읽어보는 이성복의 '다시, 정든 유곽에서'.
이 시를 처음 접한 건 시집이 아니라, 헌책방에서 구한 <초현실주의>(동아출판사)란 책에서였다(이 책을 다리 삼아 이성복의 다른 시집들로 넘어갔다). 저자는 아폴리네르의 캘리그램을 설명하면서, 한국의 유사한 사례로 이성복의 시 일부를 언급했다. 캘리그램이라고 보기엔 애매한 부분도 있지만, 저 글줄을 물의 흐름으로 읽는다면 가능한 일이다. 물에 몸을 맡기고 함께 흐르면서 '몸도 마음도 안 아픈 나라'로 가는 상상을 한다.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닿을 수 없어도.
갈 수 있을까
언제는 몸도
마음도
안 아픈 나라로
귓속에
복숭아꽃 피고
노래가
마을이 되는
나라로
갈 수 있을까
어지러움이
맑은 물
흐르고
흐르는 물따라
不具의 팔다리가
흐르는 곳으로
갈 수 있을까
죽은 사람도 일어나
따뜻한 마음 한잔
권하는 나라로
아, 갈 수 있을까
언제는
몸도
마음도
안 아픈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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