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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와 화해' 말하는 하루키의 상상력-<도쿄기담집>

by 야옹서가 2006. 4. 17.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이후 5년 만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이 출간됐다. 기존 단편 소설 네 편과 신작 ‘시나가와 원숭이’를 묶어 펴낸 책이다. 책 제목만 본다면, 어딘지 모르게 음산하고 기괴한, 그러면서도 하루키 특유의 유쾌한 상상력이 버무려진 이야기일거라는 기대가 생긴다. 특히 하루키는 장편 소설 못지않게 단편 소설과 에세이 등 짧은 글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온 만큼, 이번 단편집에 쏟아진 관심도 그만큼 컸다.

한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기대치와 다르다고 느낄 사람도 적지 않을법하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자연스럽게 환상을 일상 속으로 끌어들이는 하루키의 화법은 여전하지만, 그의 전작을 읽을 때마다 감탄했던 상상력은 절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깊고 진한 맛이 담긴 갈비탕을 기대했는데, 담백한 설렁탕이 나왔을 때 느끼는 당혹감이랄까.


자극적 괴담 아닌, 담백한 기담집

이런 실망은 기담집이라는 설정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시각 차이에서 온다. 일본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괴담’의 자극적인 맛을 기대한 사람이라면, 현실을 약간 비틀어 놓은 ‘기담’의 밋밋함에 실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책은 기이함을 부각시키기보다, 상처 입은 사람들이 이를 어떤 식으로 극복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 극복에 개입하는 것이 환상과 우연, 즉 기담의 요소다.

수록 소설 중 ‘시나가와 원숭이’는 환상이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매개체로 작용하는 대표적 사례다. 미즈키는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병을 갖게 되어, 지속적으로 정신 상담을 받는다. 한데 황당하게도 병의 원흉은 미즈키의 이름표를 훔쳐간, 말하는 원숭이로 밝혀진다.

이 원숭이는 지하에 사는 기이한 생명체라는 점에서 하루키의 전작에 등장하는 야미구로를 연상시키지만, 한편으로는 미즈키의 심층세계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는 원숭이의 폭탄 선언은 미즈키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가족과의 불화를 현실 세계로 끌어내며, 미즈키는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건망증 이면에 숨은 마음의 병을 치유한다.

다른 소설의 경우도 비슷하다. 예컨대 ‘우연한 여행자’에 등장하는 게이 조율사는 10여 년 전 의절한 누나처럼 귓불에 점이 있고, 유방암 수술을 앞둔 여인과 스쳐지나가는 만남을 겪는다. 조율사는 이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누나에게 안부전화를 하는데, 신기하게도 누나 역시 유방암 수술을 앞두고 있었다. 이 소설 역시 우연으로 성사된 가족 간의 화해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날마다 이동하는 신장처럼 생긴 돌’ 역시 “인생에서 진정한 여자는 세 명뿐”이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세 번의 기회를 다 써버릴까봐 안절부절못하는 소설가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가 ‘인생의 두 번째 여자’로 인해 겪는 기이한 경험을 다룬 이 소설의 이면에는, 연애를 하면서도 다음에 찾아올지 모를 인연을 계산하며 현재 상대에게 온전히 마음을 주지 못하는 현대인의 초상이 담겨 있다. 

결국 ‘도쿄기담집’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나뉠 것 같다. “하루키 소설치고는 지나치게 밋밋하다”는 비판과 “내면의 치유에 천착한 작가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했다”는 공감의 목소리가 그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야기의 기발함 면에서는 전작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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