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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빨간 미술의 고백>

by 야옹서가 2006. 8. 13.

2005년에 기획했던 단행본 <새빨간 미술의 고백>이 올해 7월 말에 출간됐다.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은 현대미술 분야를 다뤘지만 예상보다 반응이 좋다. 무엇보다도 '쉬운 미술 이야기'를 가장한 신변잡기적 에세이가 아니라, 작품에 대해서만 논한 책인데도 불구하고 선전하고 있어서 고무적이다. 퇴사한 뒤 출간된 책이라 판권에 내 이름이 들어가진 않았지만, 내심 반가운 소식이다.  

마음산책 정은숙 대표는 <편집자 분투기>에서 책이 꽂힌 모양새에 따라, 즉 책이 누워 있는지, 서가에 세로로 꽂혀 있는지에 따라 그 책의 시장 반응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잘 팔리는 책은 오랫동안 독립 매대에 누워 있지만, 반응이 미지근한 책은 그냥 서가에 꽂히기 마련이다. 일단 오프라인 대형 서점에서는, 신간 코너의 잘 보이는 곳에 책이 '누워 있다'.  온라인 서점에서도, YES24 미술일반/교양 부문,  알라딘 예술/대중문화 부문 베스트셀러 자리에 배치되어 있다.


YES24 미술일반/교양




알라딘 예술/대중문화
편집자로 일하면서 책을 만들 때의 즐거움 중 하나는 '가능성 있는 저자'를 발굴하는 것이다. 반이정 씨의 경우도 그랬다. 2005년 초 단행본 출간을 기획했을 때 반이정 씨의 대중적 인지도는 상대적으로 낮았다. 미술잡지를 돈 주고 사서 볼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저자를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겠지만, 적어도 일반 대중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게다가 저자 이름으로 나온 책도 아직 없었다. 2003년부터 1년간 중앙일보에 이 책의 씨앗이 된 미술 칼럼 '거꾸로 미술관'이 연재되긴 했지만, 연재 후 2년의 공백이 생긴 상황에서 신문 연재의 덕을 보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의 글에는 20~30대 독자들에게 매력적으로 읽힐 만한 재기발랄함이 있다. 이를테면 아래 원고와 같이.

[반이정의 거꾸로 미술관]
"예술이란 일종의 용도변경이다"

1. 이 작품이 재현해 보이려는 것은. 어느 원주민 부족의 가면(假面)입니다.

2. 가면이란 자신의 본색을 은폐하는 데 사용되는 고전적인 위장술이지요.

3. 이 작품이 위장술을 위해 채택한 방법은 원자재의 용도 변경 입니다.

4. 예술품으로 용도 변경 원자재는. 원래 어느 유명 브랜드의 운동화 표피랍니다.

5. 그 브랜드의 상호가 그리도 궁금하시다면, 작품을 꼼꼼히 뜯어보세요.

6. 작품 안에 답이 있게 마련이거든요. 한번 찾아봅시다! (Just do it!)




단행본 원고의 한 꼭지치고는 짧다. 그러나 이 글에서 '용도 변경'의 원조 격인 마르셀 뒤샹을 끌어내어 설명하면서 현대미술의 역사까지 짚어나갔다면, 분명 친절하기는 하나 지리멸렬한 글이 되었을 것이다. 작품의 원재료로 쓰인 신발의 브랜드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가면의 눈썹에 박힌 나이키 로고, 원고 맨 마지막 줄의 'Just do it!'이란 광고 문구 덕분에 독자들은 나이키 운동화의 유쾌한 변신을 깨닫게 된다. 

필자마다 고유의 특징이 있는데,  필자로서 그의 매력은 '껄렁껄렁함'이다(완성된 원고를 읽어보니 평소보다 30% 정도는 자제한 것 같다). 그리고 흡인력이 강한 짧은 글을 쓴다는 점이다. 언뜻 보기엔 가벼운 것 같지만, 짧은 글 속에서도 할 말은 다 한다. 반이정 씨를 필자로 섭외하면서 현업 미술평론가인 만큼, 활발히 활동 중인 현대미술 작가를 제대로 선별할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2000년대를 전후로 제작된 최신 현대미술 작품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책이 거의 없다는 사실도 이 책을 기획하는 데 자극제가 됐다.

미대에 다닐 때 왜 미술 단행본은 클림트나 반 고흐 같은 옛날 작가들의 책만 출간되는 건지 궁금했었다. 단행본 편집을 하게 되면서, 동시대 현대미술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은 얼마 없고, 또 그런 작가들의 도판을 많이 쓰면 저작권료 문제가 복잡해져서 그렇다는 걸 알았지만. 즉, 품이 많이 드는 데 비해 채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다들 만들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빨간 미술의 고백>이 경쟁력을 지닌다면, 미술서적 시장의 틈새를 노렸다는 점에 있다. 즉 '미술서적의 탈을 쓴, 감상적인 신변잡기적 글'과 '난해하고 현학적인 미술평론' 모두에 거부감을 느끼는 독자들에게 유용한 책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이 TASCHEN에서 펴낸 <ART NOW>처럼 최근 작가들의 작품을 일별할 수 있는 책이길 바랐다. 그리고 100%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그런 역할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직접 정한 독특한 제목도 이 책에 주목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라고 해야겠다. 책 제목은 작고한 연극배우 추송웅의 모노드라마 제목 '빨간 피터의 고백'을 패러디한 것이다. 그냥 <빨간 미술의 고백>이라고 했으면 좀 밋밋했을텐데, '새'자가 추가되면서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관용적 표현을 연상시켜서 재미있다.

꼭 내가 기획한 책이어서가 아니라, '현대미술을 다룬 책도 관점만 명확하다면 팔릴 수 있다'는 전례를 만들기 위해서, 이 책이 좋은 반응을 얻길 바란다. 그래야만 '그 나물에 그 밥'인 20세기 초반 작가들의 이야기를 골백번씩 울궈먹어 온 미술서적 시장이, 지금보다 좀 더 재미있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홍대앞 프리마켓에 갔다가, 벤치에 책이 놓여 있기에 반가워서 찍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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