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 16. 2001 | 광복절을 맞아 최근 인사동 화랑가에서 뜻깊은 전시가 열리고 있다. 8월 10일부터 31일까지 동산방화랑에서 열리는 추계예술대 판화과 정원철 교수의 열 번째 개인전 ‘접어둘 수 없는 이야기’전은 일제 치하에서 성 노예로 살았던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얼굴을 판화로 재현한 작품 31점을 선보인다. 납판에 프레스기로 할머니들의 초상화를 찍는 등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돋보인다.
정원철씨는 1997년 들른 아우슈비츠 수용소 박물관에서 역사 기록의 중요성을 절감한 뒤,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기로 결심했다. 그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의 보금자리 ‘나눔의 집’을 수 차례 방문해 ‘접어둘 수 없는 이야기’, ‘다가가기’, ‘회색의 초상’ 등 일련의 연작을 제작했다.
‘접어둘 수 없는 이야기’ 연작 15점은 2000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예술과 인권’전에 출품했던 할머니들의 초상 판화에 여러모로 변화를 준 작품. 납판에 프레스기로 찍고 주름을 만들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흑백사진처럼 정교하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얼굴의 주름살을 묘사한 크고 작은 조각도 자국이 보인다. 조각도와 치과용 드릴로 화면에 거친 자국을 남기는 정원철씨의 제작 방식은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상처입은 삶을 표현하는 데 적합하다.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는 끔찍한 기억들이 마치 조각도로 새긴 듯 깊이 각인됐기 때문이다.
말 대신 그림으로 증거한 고난의 삶
종이 대신 납판에 프레스기로 강한 압력을 가해 제작한 작품들은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이 짊어져야 했던 삶의 무게를 은유적으로 나타낸다. 긴 납판의 아래쪽에 무겁게 가라앉은 할머니들의 모습은 숙연함을 느끼게 한다. 정면을 직시하는 할머니들의 표정없는 얼굴은 험난한 운명을 원망하는 듯도 하고, 고통스런 기억에서 초연한 듯 보이기도 한다.
‘구겨진 삶’ 연작 5점은 더욱 적극적으로 할머니들의 삶을 보여준다.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육성 증언을 새긴 유리판 위에 얼굴을 찍은 납판을 구겨 붙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당시의 경험을 회고한 육성 증언은 말줄임표로 생략되고 띄엄띄엄 늘어선 단어로 표현됐다.
이밖에도 전시장 2층에는 과일을 따는 거대한 손이 보인다. 그 과일 속에는 젊은 여자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이 직접 그렸던 그림을 목판에 음각으로 모사한 ‘다가가기’ 연작도 눈길을 끈다. ‘다가가기’ 연작에는 일장기 위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일본군과 그 옆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성의 모습이 함께 묘사돼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관람객이 직접 종군위안부 할머니의 얼굴을 판화로 만들 수 있는 코너도 마련됐다. 판화지 위에 종군위안부 할머니의 얼굴 윤곽을 새긴 종이를 덧대고 음영이 될 부분에 관람객이 한 명씩 손도장을 찍어나간다. 붉은 손도장이 여백을 가득 메웠을 때 덧댄 종이를 떼어내면, 손도장이 찍히지 않은 하얀 부분과 붉은 부분이 대조를 이루면서 얼굴이 완성된다. 문의 02-733-5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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