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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사 | 칼럼/인터뷰

화가 나혜석에 비춘 한국 여성의 삶과 그림 - 미술평론가 염혜정

by 야옹서가 2001. 7. 18.

 Jul. 18. 2001
| 한국 최초의 여성화가로 가부장적 사회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해 주목과 비난을 동시에 받았던 정월 나혜석의 삶과 예술을 조망한 《여성의 삶과 미술: 나혜석과 현대 여성작가 3인》(창해)이 출간됐다. 이 책의 전반부에는 근대 미술을 한국에 도입한 나혜석의 화업 외에 여성해방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삽화 및 목판화, 각종 기고문 등의 자료가 정리됐으며, 후반부에는 김원숙·한애규·정종미 등 현대 여성작가 3인의 작품론이 실려 과거와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작가들의 모습을 비교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나혜석은 한국의 ‘르네상스 우먼’
글쓴이 염혜정씨는 ‘나혜석 자료모음전’을 준비하던 한국미술관 김윤순 관장의 제안으로 책을 펴냈다. 나혜석의 자료 위주인 전시의 시각적 측면을 보완하기 위해 추가로 현대 여성작가 3명의 작품을 선정했고, 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새로 발견된 작품 ‘화홍문’ 관련 자료도 수록했다. 나혜석의 삶을 정리하는데 이구열씨의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이상경씨의 《인간으로 살고 싶다》, 서정자씨의 《원본 정월 라혜석 전집》등의 자료가 많은 도움이 됐다.

“나혜석은 사상 면에서는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였지만 작품은 페미니즘적인 내용이 아니라서, 미술계 쪽에서 정리하는 걸 꺼려했던 부분도 있었죠. 하지만 삽화나 목판화 속에서는 나혜석의 독특한 의식이 드러나는 부분이 많아요. 그래서 그 부분과 그림 부분을 연결하고자 했죠. 나혜석이 쓴 1923년의 ‘모(母)된 감상기’나 1934년의 ‘이혼고백서’를 읽으면 여자의 삶에 대해 요즘도 하기 어려운 진보적인 이야기를 서슴지 않고 했어요. 요즘 페미니스트들은 약아서 전략적으로 행동하는데, 나혜석은 자기를 전부 던진 거죠. 한국의 ‘르네상스 우먼’이었어요. 개화여성으로서 선구자적 사명의식을 갖고 있었고요.”

화가이면서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짊어져야 할 부담으로 나혜석이 갈등했던 것처럼 염혜정씨 역시 삶의 과정에서 여러 번 선택의 기로에 놓인 적이 있다. 남편과 함께 1977년 미국유학을 떠나 미술사 공부를 시작했지만 남편 뒷바라지와 학업을 병행하다 학위과정을 중도에 포기했고, 1993년 환기미술관의 큐레이터로 2년간 일하다가 둘째 아이의 양육 문제로 일을 접어야했기에 염혜정씨는 나혜석의 고민을 충분히 공감한다고 했다. 그러나 나혜석이 급진적인 사고방식으로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충돌하며 자기소멸의 길을 밟았던 것과 달리, 염혜정씨는 조금 느리지만 천천히 자신의 길을 밟아나가는 쪽을 택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할 수 있는 미술평론과 번역 일을 놓지 않았고, 2000년 12월에는 수필집 《어둠의 고개를 넘어서 가라》를 냈다.

“저는 미술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있어서 책 쓰고 전시기획 하는 게 가능했죠. 일단 아이에게 충실하고 나서 10년쯤 뒤에 나에게 기회를 주자 생각했어요. ‘다른 사람들이 서른에 하는 거, 나는 마흔에 한다’고 생각하자고요.”

페미니즘 미술도 조형성에 신경 써야
염혜정씨는 페미니즘 미술의 문제점으로 투쟁적 발언이 앞서 조형성 부분에서 미흡해지는 점을 꼽았다. 그래서 이번에 후반부에 소개한 현대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선정할 때도 여성주의적 작업을 하는 작가보다 조형성 면에서 자기 세계를 확고히 한 작가를 우선 선정했다. 그래서인지 김원숙이나 정종미의 얼굴 없는 여인에서는 자기 발언이 강한 여성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가정 속에서 비치는 여성의 일상과 남성의 모습을 대비시키고 모성의 강인한 모습을 큰 덩어리로 표현한 한애규의 작업이 그나마 여성주의 미술에 가깝다.

여성주의 미술을 평생의 주제로 삼기보다 다양한 분야의 글쓰기를 하고 싶다는 염혜정씨의 다음 목표는 유행처럼 번지는 대규모 설치미술에 대한 비판적 평문과 함께, 동양화에 대한 관심을 새로이 부각시키는 일이다. 어려운 문장으로 도배한 미술평론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미술서적을 펴내는 것이 염혜정씨의 장기적인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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