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 11. 2003 | 역삼동 스타타워 2층에 위치한 스타타워갤러리에서는 8월 23일까지 서양화가 김점선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지난 6월말 끝난 서른 번째 개인전의 연장전인 이번 전시는 기존 유화작품 외에 컴퓨터로 그린 디지털 회화 3백50여 점을 함께 소개한다.
서른 번째 개인전이 “30호 미만 그림이 아니면 판매가 어렵다”는 이유로 소규모 상업화랑에서 외면했던 대작들을 마음껏 소개하는 자리였다면, 이번 연장전은 얼마 전 오십견과 함께 찾아온 팔의 통증을 줄이기 위해 시작한 디지털 회화의 다채로움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화투를 주제로 한 50여 점의 신작에서는 김점선 특유의 기발함이 넘친다.
민화를 닮은 소박하고 서정적인 세계
1983년 첫 개인전을 연 이래 아이가 그린 듯 단순 간결하고 천진난만한 화풍으로 담아온 김점선은 1987∼88년 평론가협회가 선정한 미술 부문 ‘올해 최고의 예술가’로 연거푸 선정되면서 대중에게도 익숙해졌다. 캔버스 위를 왕복했던 그의 붓은 최근 타블렛과 전자펜으로 바뀌었지만, 그가 사랑하던 대상은 여전히 디지털 회화에 고스란히 담겼다.
과거 서민들이 호랑이, 닭 등이 등장하는 저렴한 민화를 사다가 액막이를 하고 복을 기원했듯, 그 역시 컴퓨터를 통해 대중화된 예술을 꿈꾼다. 액자조차 하지 않고 다락 문짝에 철썩 붙였고, 해가 지나면 떼어내지도 않고 다시 그 위에 새로운 그림을 붙이곤 했던 보통사람들의 민화는 그에게 신선한 예술적 공감의 대상이었다.
그래서일까, 늘 씨익 웃는 표정을 하고는 겅중겅중 뛰어다니는 말, 무덤덤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고양이, 초식동물이지만 큰 덩치 덕분에 자기 몸을 지키는 코끼리, 도무지 무섭지 않은 배불뚝이 호랑이 등은 민화 속의 해학적인 동물 표정과도 많이 닮았다.
문화엄숙주의에 날리는 ‘똥침’ - 화투연작
이번 전시에서 화제를 모은 일련의 화투 연작은, 기존 작품의 아기자기하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벗어난 작가가 문화엄숙주의에 빠진 사회를 향해 날리는 일종의 ‘똥침’이다. 김점선은 특정 계층이 향유했던 문인화와 달리 민중 사이에서 필사되면서 압축되고 다듬어진 정수가 화투 그림이라고 믿는다. 대가의 부담스러울 만큼 값비싼 그림이나, 생계를 위해 의무적으로 그리는 그림이 아닌, 오로지 재미있게 놀기 위해 히히히 웃으며 만든 그림이 화투라는 것이다.
‘유치찬란’이라는 단어 속에 뜻하지 않은 찬란함이 숨어있듯, 촌스럽기까지 한 원색의 화투 그림들이 수십 점 어우러져 꿈틀대는 색채의 바다는 예상치 못한 장관을 이룬다. 화투라고 하면 저급문화, 도박 등 부정적인 생각만을 떠올리는 사람들에게, 김점선은 그렇게 온몸으로 일갈을 날린다.
예컨대 7월 홍싸리에 돼지 대신 말이 등장하고, 빛 광(光)을 한글로 꽝꽝 박아 넣은 그의 화투 그림은 지극히 경쾌하고 가볍다. 12월에 게다 그림이 들어가 있는 건 일제치하 때 인쇄소에서 강제로 집어넣은 것일 거라고 주장하고, 독립운동가들이 둘러앉아 사발통문을 작성하다가 순경이 들이닥친다 싶으면 얼른 화투를 꺼내놓고 시치미를 뗐을 거라는 그의 상상력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화투를 소일거리 삼아 치시던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린 화투 그림이기에 할머니가 자식, 손자를 챙기듯 누군가의 복을 기원하는 애틋함도 배어있다. 그림의 네 귀퉁이에 뜬금없이 건양다경, 만수무강, 입춘대길 등의 축원이 버젓이 등장하는 건 그 때문이 아닐지. 그의 화투 그림은 실물 화투로도 제작돼 시판될 예정이라고 하니 기대된다.
본 전시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관람시간은 오전 10시∼오후 6시까지이며 일요일은 휴관. 화투 그림은 갤러리카페 ‘커피반’ 에서 관람 가능하다. 문의전화는 02-2112-2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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