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흙장난을 하는 아이를 발견했을 때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엄마의 반응은 뭘까? 아마 십중팔구 아이를 일으켜 세우고는 옷에 묻은 흙을 바라보며 한탄할 것이다. ‘오늘도 빨래거리가 하나 늘었구나’ 하고. 하지만 이런 꾸중을 듣고 움찔하는 순간 아이는 창의적인 잠재력을 발휘할 기회를 차단당한 셈이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놀 거리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아이를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별관에서 6월 6일까지 열리는 이영란의 흙 설치놀이 ‘바투 바투’가 눈길을 끄는 건, 요즘처럼 다채로운 장난감이 난무하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자연은 가장 좋은 장난감’이란 사실을 설파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어른과 아이가 모두 흙 속에서 즐거운 공연장에서, 골목대장처럼 활기 넘치는 모습의 연출가 이영란(39) 씨를 만났다.
온몸으로 경험하는 흙의 물성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토끼굴로 뛰어드는 모험을 감수했듯,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데는 통과의례가 필요하다. 아이들은 첫 번째 흙놀이 마당으로 들어가기 전에 주머니를 받아 신발을 넣고, 봇짐처럼 질끈 동여맨 채 맨발로 들어가야 한다. 정말 여행 떠나는 기분이 물씬 난다. 첫발을 내딛는 순간, 발바닥을 푹신하게 감싸 안는 촉촉하고 말랑말랑한 흙과의 첫 만남으로 ‘바투 바투’는 시작된다.
실내공간으로 들어온 흙 마당이 빛과 음악을 만나 태어난 경이롭고 낯선 세계에서,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기존에 접했던 흙과 전혀 다른 새로운 느낌을 받는다. 공연장에서 흙은 폭신한 융단도 됐다가, 물감이 되는가하면, 말랑말랑한 반죽이 되고, 이야기무대로 변신한다. 이처럼 다양한 흙의 얼굴을 경험하면서 몸의 감각을 총동원해야 즐길 수 있는 ‘바투 바투’는 완성된 결과물을 수동적으로 구경하는 게 아니라 체험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런 공연 구성은 이영란 씨의 개인적인 취향과도 맞닿아있다.
1998년 오브제 연극 ‘레이디 맥베스’ 로 백상예술대상을 수상하며 널리 알려진 이영란 씨의 원래 전공은 조각이었지만, 넓은 세상에서 사람들과 자유롭게 소통하고 싶었던 그의 마음은 갤러리를 떠나 있었다. 작품을 완성했을 때보다 차라리 만드는 과정이 더 즐거웠던 기억을 무대에 가져다놓고 조명과 음악을 더해 작업으로 만든 것이, 이영란 씨가 작업해온 일련의 오브제 연극이다. 특히 1992년 필립 장띠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자연 그대로의 사물이 무대 위에 올라왔을 때 계속 변화하고 소멸되는 과정을 몸소 경험했던 기억은 그의 마음속에 가장 큰 힘으로 남았다. 무대 위에서 사물은 배우 이상의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직도 “단순한 사물 속에 숨은 언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고 믿는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밀가루, 흙, 물 등 원시적인 재료로 작업을 해온 그가 흙으로 설치놀이공간을 펼친 것은 4년 전부터였다. ‘내게서 멀어지는 것은 작다’라는 자신의 창작극에서 착안해, 흙으로 공연을 하고 어린이들이 놀면서 참여할 수도 있는 프로그램은 어떨까 하고 만들어본 것이 예상치 못한 큰 호응을 얻었다. 2000년 부천 어린이페스티벌을 시작으로, 2001년 프랑스 오흐리 놀이페스티벌, 2002년 죽산 어린이축제를 거쳐 2003년의 첫 ‘바투’ 공연, 그리고 올해의 ‘바투 바투’ 공연에 이르기까지 그의 흙놀이 공간은 마치 살아있는 아이처럼 해마다 성장을 거듭했다. 올해는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별관의 전시실 두 개를 30톤의 옹기토로 채워, 공연장을 찾아온 아이들이 보다 극적인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자연에 대한 새로운 지각으로 일깨운 감성
“아이들이 흔히 흙은 더럽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 관념을 뒤집어보고 싶었어요. 흙이란 소재의 특성을 아이들이 예술적으로 경험할 수 있길 바랐고요. 예를 들어 흙물로 그림그리기 같은 것만 해도, 옛날 풍경을 재현한 항아리에서 마치 4차원의 세계가 열린 것처럼 표현했어요. 항아리 속에 빛을 넣고, 그 빛 위에서 아이들이 한지를 놓고 흙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요.”
그의 작업에서 흙 못지않게 큰 비중을 하는 것이 빛의 역할이다. 전시실 외벽은 툭툭한 느낌의 어두운 천으로 가리고, 천 위에 별자리 그림을 그려 넣어 공연장 안으로 들어온 아이들이 마치 신비한 우주 속으로 빨려 들어온 듯 느끼게 했다. 또한 공룡마을을 둘러싼 호수에 소원동전을 던지면, 물의 파동이 천정에 그림자로 반사돼 아른아른 움직이는 그물을 만들어내는 순간도 인상 깊다. 물의 성질을 빛과 그림자만으로 새롭게 만나는 체험을 아이들에게 준 것이다. 지금은 단지 신기하고 재미있는 경험일 뿐이겠지만, 이처럼 몸과 마음으로 새롭게 느낀 자연의 기억은 어른이 된 후에도 다른 감성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리라고 이영란 씨는 믿는다.
‘바투’라는 단어는 ‘두 물체 사이가 아주 가까이 있는 상태’의 순 우리말이라고 한다. 함께 온 엄마와, 옆자리 꼬마친구와 나란히 앉아 함께 뭔가 만드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소통에 대한 희망, 그것은 자연에 대한 새로운 지각과 함께 이영란의 무대 위에서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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