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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원의 길고양이 통신]/[고양이 여행] 한국

내 마음의 첫 번째 길고양이

by 야옹서가 2007. 5. 12.

맨 처음 찍은 길고양이 사진이 어떤 것이냐고 물어보면, 늘 밀레니엄 삼색 고양이라고 얘기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말이 맞고, 어떤 의미에서는 틀리다. 밀레니엄 고양이는, 내 마음에 들어온 첫 번째 길고양이다. 그 녀석과 만나면서 처음으로 길고양이 사진을 꾸준히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연속성 면에서 본다면 밀레니엄 삼색 고양이의 사진이 첫 번째 길고양이 사진인 셈이다.

반면 서소문 뒷골목에서 찍은 길고양이 사진은 길을 가다 무심코 찍은 것이지만, 거리를 헤매는 길고양이처럼 고단했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첫 사진이어서 소중하다. 

이 사진을 찍은 건 2001년 4월쯤, 밥벌이와 무관한 그림 전공으로 대학원을 졸업한지 두 달째 되던 무렵이었다. 내가 해온 공부로는 미술학원 강사 아니면 단기 아르바이트밖에 할 수 없었다. 지난 몇 년간 소중하게 여겨온 일들이 정작 사회에서는 쓸모 없는 짓거리로 치부되는 현실이 씁쓸하고 허전했다. 그런데, 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헛헛함을 사진이 채워주었다. 서소문 근처에서 만난 길고양이 사진도 이 무렵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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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쓰다 버린 캐비닛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곳, 철거 직전의 빈 집 같은 냄새를 풍기는 골목길 한가운데, 버려진 물건처럼 무심한 얼굴의 길고양이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50mm 렌즈밖에 없어서 코앞으로 바짝 다가가 찍었지만, 녀석들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 이상한 무심함이 마음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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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크게 보면 두 가지 이유에서 사진을 찍는다. 어떤 이는 피사체가 아름답거나 경이롭기 때문에 찍고, 또 다른 이는 피사체의 '어떤 속성'이 제 마음의 '어떤 부분'과 공명하기 때문에 찍는다. 두 번째 유형의 피사체는 보편적인 미의 기준과 무관하거나, 혹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내게는 길고양이 사진이 그랬다.

롤랑 바르트의 매혹적인 사진 에세이 《카메라 루시다》는 이 두 유형, 즉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의 차이를 보여준다. 보편적인 문화적 기호에 속하는 스투디움은 "누구에게나 세련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그러나 생기는 없는" 사진의 속성이다. 스투디움이 지배하는 사진은 잘 찍은 관광엽서나 웨딩스튜디오 사진 같은 것들이다. 잠시 경탄하거나 흥미로워할 수는 있지만, 보는 이의 마음 깊은 곳을 흔들지는 못한다.

이에 반해 라틴어로 '작은 점, 상처'를 뜻하는 푼크툼은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마음을 움직인다. 푼크툼은 누군가에게는 "보는 이의 가슴을 날카롭게 찌르면서, 상처 입히고 주먹으로 때리는" 듯한 통찰의 순간을 이끌어내지만, 피사체와 교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메시지도 주지 않고 홀연히 사라진다.

1년이 지나 종각역 근처에서 밀레니엄 고양이를 만났을 때, 예전에 찍었던 서소문 길고양이 사진을 다시 찾아보았다. 흑백 사진 속에 정물처럼 반듯하게 고양이들이 앉아 있다. 그제야 왜 그때 그 녀석들을 찍었는지 알 것 같았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사람처럼, 가슴이 쿵쿵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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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모든 그림은 자화상이라는 말이 있다. 인물을 그렸거나, 풍경을 그렸거나 상관없이 그 속에 그린 사람의 자아가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진도 그런 면에서 다를 게 없다. 어떤 피사체를 '찍고 싶은 것'으로 느끼는 순간, 그 사진 속에는 내가 있다. 달리는 길고양이, 먹을 것을 찾아 쓰레기통을 뒤지는 길고양이, 치타처럼 날렵하게 달려 사라지는 길고양이, 무심하게 몸을 둥글리고 앉은 길고양이 속에 들어앉은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오래된 사진에 찍힌 피사체의 의미를 발견하는 건, 그 속에 숨은 나를 발견해가는 일이다.

서소문 길고양이의 사진은 그런 면에서 내게 소중한 사진이었지만, 정작 《나는 길고양이에 탐닉한다》를 만들 때는 쓰지 못했다. 대신 필름 스캔을 받아 인쇄용으로 크게 쓸 수 있어서 <길고양이가 있는 따뜻한 골목>전의 포스터 사진으로 썼다. 서소문 길고양이들에 대한 마음의 빚을 그것으로 청산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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