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와 구멍

집에 10년 묵은 듀오백 의자가 있다. 등받이는 멀쩡한데, 허벅지가 쓸리는 좌판 앞부분이 조금씩 해지는가 싶더니 급기야 스밀라가 몇 번 발톱으로 잡아뜯으면서 구멍이 생겼다. 구멍이 작았을 때 순간접착제 같은 걸로 천 가장자리를 붙여주었으면 해결됐을 텐데, 귀찮다고 하루하루 미루다 보니 구멍은 점점 커졌다. 나중엔 해진 자리가 여러 군데가 되어서 보기가 심히 괴로운 지경이 됐다. 그냥 쓰긴 불편하고, 그렇다고 다른 곳은 멀쩡한 의자를 버리긴 아깝고.
 
듀오백 홈페이지에 들어가봤더니 의자 커버만 따로 팔고 있었다. 이중 망사 재질이란다. 색깔이 보라색과 파란색 단 두 가지여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일단 파란색으로 구입해봤다. 며칠 써 보니 그럭저럭 쓸만은 한데, 좌석 부분의 커버가 자꾸 벗겨져서 불편하다. 어쨌든 속은 곯았을지 몰라도, 외관상으로는 새 의자와 비슷해졌다.

낡아빠진 이 의자를 가장 좋아하는 건 스밀라다. 나야 그냥 의자가 방에 있으니까 쓰는 것뿐이지만, 스밀라는 수많은 누울 곳들 중에서 굳이 이 의자를 '선택'한다. 내가 일하다가 잠시 자리를 비울 때나 잠자리에 들 때, 바닥에 누워있던 스밀라가 기다렸다는듯이 잽싸게 의자로 뛰어올라오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아마 좌판의 굴곡 부분이 턱을 고이기 편해서일 수도 있고, 또 내가 잘 때 지긋하니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여서 그런지도 모른다. 스밀라가 자는 모습을 보면, 근심없이 달게도 자는구나 싶다. 그 잠에는 의심이 없다. 언제 이런 평화가 깨질까 하는 불안도 없다. 나도 내게 그런 믿음이 좀 생겼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세상의 많은 것들이 불안을 먹고 자란다. 자유의지로는 선택하지 않았을 길을, 불안한 상황에 놓이지 않기 위해 감내한다. 그렇게 해서 불안이 사라진다면 좋겠지만, 문제는 그렇게 하더라도 불안은 여전하다는 데 있다. 대충 테이프로 땜빵해놓긴 했지만, 언젠가 새 의자커버 밑에 숨겨진 구멍도 다시 커질 것이다. 다만 구멍이 커지는 속도가 더뎌지고, 그 과정이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을 셈이다. 의자를 버리지 않으면 구멍도 여전히 존재하겠지만, 망가지기 전까지 감내하면서 살아볼 셈이다. 오래된 의자처럼 내 안의 어느 구석도 해지고 구멍나서 나달거리겠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으련다. 바라는 게 있다면, 그 과정이 조금 덜 아프기를. 스밀라처럼 무념무상 얼굴로 불안을 깔고 앉아버릴 수 있기를.

이 얼굴이 진정한 무념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