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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원의 길고양이 통신]/[고양이 여행] 한국

분홍코 길냥이의 '호기심 천국'

by 야옹서가 2009. 1. 28.
밀레니엄 고양이 중 가장 인기 많은 밀크티를 위협할 만큼 매력적인 길고양이가 나타났다. 바로 분홍코 아깽이가 그 주인공이다. 보통 길고양이들은 먹이를 파헤치고 쓰레기통을 뒤지느라 콧잔등에 까만 때가 묻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때는 어지간해서는 잘 지지 않는다. 하지만 분홍코 아깽이는 아직 어려서인지, 혈색 좋고 빛깔이 선명한 분홍색 코를 간직하고 있다. 
눈밭을 종종걸음으로 누비고 다니는 분홍코를 보니 함민복 시인의 에세이 중 한 부분이 떠올라 옮겨 적는다. 생전 처음 눈을 본 '햇개' 길상이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대목이다.

눈 내린 새벽 장갑과 모자를 준비하고 마당으로 나가 찬 공기부터 한 큰 숨 들이마셨다. 그러고 나서 개집 지붕을 쓸어주었다. 난데없는 사방 은세계에 어리둥절한 똥개의 눈빛.
'야, 길상아, 너는 햇개니까 눈을 모르겠구나, 이게 눈이라는 것이다.'
세월을 조금 더 살았다고 잘난 척을 하며 눈을 가르쳐주었었지. 그러다가 집 뒤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를 향해 죄송하다고 고개 숙였었지.   
-함민복, <사람소리> 중에서



분홍코도 아직 1살을 넘기지 못했으니 햇고양이인 셈이지. 비록 처음 눈을 본 길상이와는 달리, 눈 구경한 경험은 몇 번 있었겠지만 말이다.


길고양이를 따라다니다 보면 다양한 성격의 고양이를 만나게 된다. 분홍코는 아직 어린 고양이지만, 호기심이 왕성하기로는 형님들에 지지 않는다. 카메라를 향해 바짝 얼굴을 들이미는가 싶더니, 기어이 땅바닥에 책상다리로 앉은 내 옷자락 사이로 파고들려고 머리를 디민다. 코트 속이 바람막이처럼 따뜻해 보였을까, 아니면 뭔가 맛있는 냄새라도 났던 걸까. 보통 밀레니엄 고양이들은 내가 곁에 있어도 거리낌이 없어서, 망원렌즈를 쓰지 않고 표준 줌렌즈인 17-50mm를 주로 쓰는데, 이 정도 거리에서 이런 각도로 얼굴이 나오려면 고양이가 정말 코앞까지 다가온 거다. 거리가 가까워서 약간의 형태 왜곡이 생겼지만, 덕분에 재미있는 사진이 됐다.  


이미 눈은 멎었지만, 나뭇가지에 쌓여 있다가 바람이 불면 나풀나풀 떨어지는 눈송이가 있어, 분홍코의 눈동자도 눈 떨어지는 궤적을 따라 움직이기 바쁘다. 스삭스삭-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소리, 눈 떨어지는 소리에 한쪽 귀를 갸우뚱 기울여 가며...호기심 어린 호박색 눈동자가, 천상 어린 고양이다운 모습이다. 


옹송그려 앉은 형님들을 뒤로 하고, 제일 가까이 다가와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분홍코다. 앞발을 얌전히 감싼 줄무늬 꼬리가 정말 사랑스럽다. 편애하면 안되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붙임성 있는 녀석에게는 맛있는 것 하나라도 더 주고 싶은 법이다. 분홍코도 자기의 매력을 알고 있을까. 행동 하나하나에 자신감이 넘친다. 이런 분홍코의 성격을, 어린 길고양이의 무모함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새끼 길고양이 중에서도 인간을 무서워하고 몸을 사리는 녀석들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호기심도, 먹을 것에 대한 기대도 잠시. 어딘가에서 새 소리가 들려오자 나무에 폴짝 뛰어오르더니 순식간에 2미터 높이까지 올라간다. 비록 새를 잡지는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볼 뿐이지만, 저렇게 수직운동을 하며 근력을 기르는 것이다. 올 겨울을 무사히 나면, 분홍코도 이제 어엿한 어른 고양이가 되어 형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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