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내린 다음날, 길고양이들은 어떻게 혹독한 추위를 견딜까? 걱정도 되고, 마침 설도 다가오는지라
별식이라도 챙겨줘야겠다 싶어 사료와 파우치를 들고 밀레니엄 고양이를 만나러 갔다.
처음에는 다들 어디엔가 숨어 바람을 피하고 있는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가방을 열어 부스럭거리며
사료 봉지를 꺼내고 있자니, 얼굴이 익은 녀석들이 한두 마리 고개를 내밀고 어슬렁어슬렁 다가온다.
몇 년 간 드나들며 서로 얼굴을 익힌 터라, 따로 인사치레를 하지 않아도 '저 인간이 밥을 주러 왔구나' 정도는
금세 알아차리는 것이다. 밀크티가 제일 먼저 앞장서고, 호랑무늬 고양이를 비롯한 친구들이 뒤따랐다.
이곳에는 보통 7~8마리가 상주하는데, 카오스 고양이와 항상 짝을 이뤄 다니던 젖소 고양이가 보이지 않았다.
가장 호기심이 많아서 늘 내 가방 옆까지 다가와 얼굴을 디밀던 녀석이라, 새삼스레 낯가림을 할 리도 없는데...
어딘가에 숨었을까, 아니면 겨울을 나지 못하고 세상과 이별한 것일까. 걱정스럽다.
잰걸음질치며 달려오는 밀크티 고양이의 앞발에, 고운 설탕가루처럼 반짝이는 눈가루가 묻었다.
집고양이였다면 아마 달콤한 분홍젤리 색을 띠었을 분홍 발바닥에도 세월의 때가 묻었다.
이전에 만났을 때 마음을 짠하게 만들었던, 짜디짠 라면 국물은 지워진 지 오래였다.
밥그릇도 가져와야 하는데 오늘따라 파우치를 챙기면서 부산을 떠느라 미처 그릇 챙길 생각을 못했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이 눈밭을 그릇 삼아 밥을 놓아주었다. 사료도 평소 주던 대로 양을 가늠해서 가져왔건만,
먹어치우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날이 추워 음식다운 음식을 제대로 구하지 못했던 것인지, 다들 몹시 굶주린 듯
머리를 디밀고 동그랗게 원을 그려 모여든다.
보통 서열이 높은 고양이가 먼저 먹이를 차지하는 법이지만, 밀레니엄 고양이들은 다툼 없이 사이좋게 먹는다.
뒤늦게 밥이 왔다는 걸 안 노랑둥이가 멀찍이 서서 머리를 디밀 자리를 가늠해보지만,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친구들이 먹을 만큼 먹고 자리를 비워주자, 아까 머뭇거리던 노랑둥이가 남은 사료를 먹는다.
아직 밥에 미련이 남은 왕고양이 한 마리도 함께 밥 친구가 되어준다.
눈밭에서 추위를 견디는 방법은 따로 없다. 최대한 몸과 땅이 닿는 면적을 줄이고, 몸을 부풀려 식빵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던 고양이들이 조금씩 몸을 붙여 다가앉는다. 추위를 견디려고
몸을 움츠리며 어깨를 기대는 길고양이들. 서로 몸을 붙이면 추위가 조금은 덜하다는 걸 체험으로 아는 까닭이다.
추위를 이기려는 본능적인 자세인데, 세 마리가 붙어있는 모습을 보니 귀여우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가운데 있는 녀석이 그래도 제일 따뜻하겠지. 초등학생 때 좋아하는 친구의 손을 잡고 가려고, 다른 친구들과
신경전을 벌이던 기억이 난다. 그때 가운데 서서 어쩔 줄 모르던 그 친구는 행복했을까, 난감했을까.
추워도, 배고파도 친구들이 있기에 밀레니엄 고양이들은 힘겹게나마 겨울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추울 때는 서로 몸을 부비며 체온을 유지하고, 먹을 것이 생기면 사이좋게 나눠 먹으며.
우두머리 한 놈과 그 측근들만 좋은 자리와 먹을 것을 독점해서 결국 힘센 놈들만 살아남는 게 아니라,
비록 춥고 배고파도 다같이 살아남자는 마음으로 견딜 것이다. 비록 밀레니엄 고양이들을 매일 지켜보지는 못하지만,
밥다운 밥을 보았을 때 녀석들이 보여준 태도를 보면, 그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행님아, 올해도 맛있는 것 많이 먹고 행복했음 좋겠다." "그러게..."
멀리 달아나는 까치를 바라보는 길고양이의 얼굴 위로, 이런 대화가 지나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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