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어느 면접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면접이 마무리 단계에 이를 무렵, 면접관이 물었다.
“취미는 뭐죠?”
틈나는 대로 헌책방을 다녔고 헌책방 동호회 운영진도 맡았던지라, 별 고민 없이
“헌책방 다니기입니다”하고 답했더니, 면접관이 떨떠름한 얼굴로 되물었다.
“다른 취미는요?”
“가끔 구체관절 인형도 만들고, 길고양이 사진도 찍는 것도 좋아하고요.”

면접관의 표정은 헌책방 이야기를 꺼냈을 때보다 한층 더 굳어졌다.
“주로 ‘혼자’ 하는 일이네요.”
그의 말은 짧고 단호했다. 면접관은 더이상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 회사에서도 다시 연락은 없었다.
 
면접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좀더 정치적인 대답을 해야 했을까?’ 싶어 잠시 후회했다.
하지만 ‘관심도 없는 걸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그런 걸 문제 삼는 회사라면 그냥 가지 마’
하는 생각도 불끈 들었다.

과거에 비해 애묘 인구가 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고양이를 좋아하는 취향을 이해받기란 쉽지 않다.
“키우려면 개나 키우지, 고양이를 키워요?” 하고 의아한 듯이 묻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게다가 집고양이도 아닌 길고양이를 좋아한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들 앞에서 길고양이의 매력을 이야기하다 보면, 문득 느끼게 된다. 상대방의 머리 위에
‘이런 고양이 오타쿠를 봤나’라는 대사가 적힌 말풍선이 둥둥 떠다닌다는 걸.  
이런 상황이고 보니,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 간에 유독 결집력이 강한 것도 이유가 있는 듯싶다.
좋아하는 대상 때문에 핍박을 당해본 사람이라면, 함께 어려운 시절을 견디는 ‘동지들’에게
끈끈한 동료애를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람이 있다면, 누구나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
그 대상이 다수의 취향과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길고양이를, 이구아나를, 악어거북을 좋아한다고 해서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기보다,
왜 그런 동물을 좋아하는지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를, 부디 타인의 취향에 관대해지기를.

해가 바뀔 때마다 늘 하는 다짐이 있다. ‘올해는 좀 버리면서 살아야지.’ 공간 정리 전문가 캐런 킹스턴은 써야 할 물건과 버려야 할 물건을 가리는 기준은 ‘1년 동안 이 물건을 썼는가, 쓰지 않았는가’라고 한다. 1년 동안 한번도 쓰지 않은 물건이라면, 앞으로도 결코 쓰지 않을 물건이니 버리는 게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버려야 할 것들로 가득 찬 창고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있는 것을 내다 버려도 모자랄 판에, 버려진 책이나 인형이 보이면 어쩐지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서 덥석 줍고 마니, 이것도 고질병이다 싶다. 헌책을 주워 읽다 보면, 속표지에 사랑 고백이나 축하·격려 말을 적어놓은 책이 눈에 띄는데, 그런 책을 보면 그 글씨의 주인공이 상상되어 마음이 스산해진다.

분리수거 전날 밤이면 운동도 할 겸, 폐지로 버려질 책도 구제할 겸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돌곤 하는데, 하루는 어슬렁어슬렁 산책을 하다가 기이한 광경을 봤다. 재활용품을 분리해 가득 쌓아둔 가로등 아래, 조그맣고 누런 것이 줄에 묶여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종을 알 수 없는 잡종 강아지였다. 발작적으로 심하게 떠는 모습을 보니, 추운 것보다 중병에 걸린 것처럼 보였다. 경비 아저씨는 ‘누군가 와서 묶어놓고 갔는데 한참 지나도 찾아가지 않는다’며 혀를 찼다. 세상에, 개도 분리수거 품목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니. 키우던 개를 분리수거장에 버리는 사람의 심리는 어떤지, 어지간한 상상력으로는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기르던 동물을 내버리는 사람들이 자기합리화처럼 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야생에서 자유를 누리는 게, 갇혀 사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실내 생활에 길들여진 동물한테, 거리 생활은 자유가 아니라 공포일 뿐이다. 게다가 지난달 27일부터 적용된 새 동물보호법에서, 유기 동물은 보호소에 10일 계류 뒤 안락사를 시키도록 했다. 종전의 계류 기간이 30일이었으니, 버려진 동물들이 한층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이 된 것이다.

버려진 동물이 점차 늘어나는 상황에서, 서울시에서는 2009년 4월부터 애완견 마이크로칩 이식을 의무화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 칩은 피하 지방에 넣는 따닭에 피부를 가르지 않으면 꺼낼 수 없단다. 원래 취지대로 정착만 된다면 무책임하게 개를 버리는 사람도 줄고, 부주의로 개를 잃어버렸을 때도 찾을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등록하느냐가 관건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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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기견 앞에 놓인 운명은 보신탕집 또는 안락사뿐이다.   

고경원 길고양이 블로거 catstory.kr

고양이를 키우기 전에 나를 가장 두렵게 했던 건 ‘고양이털의 전설’이었다. 고양이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만나 힘든 점을 물으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입을 모아 “고양이털이 많이 날려요” 하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까짓 고양이털이 날리면 얼마나 날리겠나 싶어 물어보면, 대답은 한결같았다. 날마다 진공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로 바닥을 닦아도, 고양이털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고양이털은 가늘고 가벼워서, 민들레 씨처럼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다가 호흡기로 빨려 들어가기도 한단다. 어렸을 때부터 기관지가 좋지 않았던 내게는 꽤 위협적으로 들리는 경고였다.

좀더 구체적인 사례를 들려주는 사람도 있었다. 한 애묘가는 매번 고양이털이 반찬 그릇에 날아와 앉는 통에, 날마다 반찬 삼아 고양이털을 먹는다고 했다. “고양이털 일일이 신경 쓰면 밥 못 먹어요.” 그 정도쯤이야 초월했다는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또다른 누군가는 고양이털 때문에 짙은색 옷을 입기 어려울 정도라고 증언했다. 지저분해 보이지 않으려면, 외출할 때마다 고양이털 떼는 도구를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독 짙은색 옷이 많다 보니, 그 사람의 말도 한 귀로 흘려 넘길 수 없었다.

한데 얼떨결에 스밀라를 떠맡고, 녀석이 우리 집에 눌러 살리라는 걸 직감했을 때, 스밀라의 털색깔을 유심히 다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좌절했다. 스밀라의 등은 옅은 회색이고, 배는 눈처럼 희었다. 스밀라가 우아한 털코트를 휘날리며 동동동동 달려 거실을 가로지르면, 바닥에 가라앉았던 가늘고 하얀 털이 위로 천천히 날아올랐다. 흔들면 하얀 눈가루가 솟구쳤다 내려앉는 스노볼 같았다.

남의 집이라면 이런 상상을 하며 여유 있게 바라볼 수 있겠지만, 문제는 저 눈보라 날리는 거실이 우리 집이라는 사실. 결국 즐겨 입던 검은 옷도, 나가기 전에 고양이털을 제거할 만큼 여유 있는 날이 아니면 옷장 속에 고이 모셔두게 됐다.

그래서 내 인생은 얼마나 불편해졌을까? 귀찮기는 하지만, 스밀라 때문에 예전보다 자주 청소를 한다. 웬만하면 밝은색 옷을 입다 보니, 주변 사람들에게 “요즘 분위기가 밝아진 것 같아요!” 하는 인사도 듣는다. 고양이털 반찬만은 피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나는 깨끗해지고, 대범해지고, 밝아졌다. 게다가 고양이와 함께 사는 즐거움까지 얻지 않았나. 손익계산을 해 봐도, 그리 손해 보는 일은 아니다.

10년 동안 써온 컴퓨터에 슬슬 사망 기미가 보인다. 하루에 한두 번씩 꼭 ‘치명적인 오류’ 운운하는 메시지가 뜨면서 다운된다. 파랗게 깜빡이는 화면은 내게 모종의 경고를 던지는 듯하다. 그렇게 몸을 혹사시키며 살다 보면, 네게도 곧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한다고.

‘라모’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디자이너 박활민씨에게도 한때 그런 ‘시스템 오류’ 메시지가 떴다. 대개 무시하기 마련인 그 메시지를 읽었을 때, 그는 마음의 균형을 회복할 장소를 찾아 떠났다. 2003년 한국을 떠나 티베트·인도·네팔을 떠돌았고, 북인도 다즐링에서 1년을 머물렀다. 박활민씨가 다즐링에서 한 일은 ‘인생의 방학’을 즐기는 일이었다. 하릴없이 산책하고, 어슬렁거리는 고양이를 찍거나 그림을 그렸다. 명상하듯 먼 곳을 응시하는 고양이를 보면 마음이 평온했다. 고양이를 그리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삶에 대한 명상으로 이어졌다.

“다즐링에 아침 햇살이 비치면 고양이들이 지붕에 모여들어 일광욕을 하죠. 고양이를 그리면서 손으로 하는 일, 내면의 기쁨을 주는 일을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요즘은 손의 가치가 많이 훼손되고 직업은 돈을 버는 수단으로 전락했지만, 이제 삶을 바라보는 가치의 전환이 필요해요.”

서울로 돌아온 박활민씨는 본업인 캐릭터 디자인뿐 아니라, 정신의 불균형으로 고민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하는 ‘삶의 디자인’을 궁리한다. 이를 위해서 명상적인 글귀를 담은 그림 편지를 온라인 공간에 올린다. 자신의 마음을 위해 썼던 글이 같은 고민을 겪는 타인에게도 힘이 되길 바라면서. 한데 그는 왜 불특정 다수에게 그림편지를 띄울까?

“콘텐츠의 최고 기능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거예요.”

그의 답은 간결했으나, 콘텐츠의 경제적 가치를 논한 수많은 글보다 더 설득력이 있었다. 나 역시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그의 블로그에 실린 글과 사진들에 홀려 그곳으로 흘러들어갔으니. 심지어 내 컴퓨터 바탕화면에도 그의 고양이 그림이 깔려 있다. 한가로이 누운 고양이 그림 밑에 이런 글귀가 씌어 있다. “직업이 너를 바꾸어 놓게 하지 말고, 너의 본성으로 직업을 완성하라.” 가장 좋은 건 직접 그리는 것이지만, 읽는 것만으로도 그의 명상세계 속으로 스며든다. 그의 블로그 ‘라모의 편지’(buddhaboy.egloos.com)에서 그간의 그림 편지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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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가끔 어디론가 사라진다. 워낙 숨기를 좋아하는 터라 십중팔구 어딘가 으슥한 곳을 찾아들어간 거겠지만,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닌데 너무 오랫동안 보이지 않으면 ‘혹시라도 집을 나간 건가?’ 싶어 슬그머니 걱정이 된다.

무엇보다 처음으로 스밀라 실종 사태가 벌어졌을 때는 정말 가슴이 철렁했다. 스밀라가 종종 들어가 숨는 종이상자도 열어 보고, 혹시 옷장이나 싱크대 문을 앞발로 열고 들어갔나 싶어 일일이 문짝을 여닫아 봤지만 어느 곳에도 고양이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베란다 철망에 매달려 놀다가 추락한 건 아닐까, 아니면 쌓아둔 잡동사니 상자에 깔리기라도 했나’ 하고 온갖 상상을 하면서 베란다 쪽을 살피는데, 베란다방에 세워둔 책꽂이 세번째 칸에 하얀 털 뭉치가 보였다. 스밀라였다.

책꽂이와 책 사이의 빈 공간, 기껏해야 10cm 정도 될까 말까한 틈새에 스밀라가 몸을 납작하게 만들어 누워 있었다. 사람으로 치면 폐소 공포증에 걸릴 법한 좁은 곳인데도, 아무렇지 않은 듯 편안한 얼굴을 하고서. 반가운 마음 반, 얄미운 마음 반으로 잡아서 끄집어내니, 스밀라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우엥 하고 울어댔다. 왜 내 은신처를 습격하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고양이는 분명히 사막에 살던 족속이라고 들었는데, 어쩌면 이렇게도 동굴을 좋아할까?

요즘도 스밀라는 으슥한 곳을 찾아 온 집안을 헤매고 다닌다. 식탁 밑 그늘진 곳에 도사리고 있다가 의자에 앉은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들고, 장식장에 폴짝 뛰어올라 조선백자처럼 점잖게 앉아 있을 때도 있다. 이게 다 ‘나만의 고양이 동굴’을 마련해 달라는 무언의 시위 아니었을까.

여자가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돈과 자기만의 방이라지만, 고양이가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동굴이 필요한 모양이다. 결국 모양새는 그리 좋지 않지만, 스밀라를 위해 거실에 간이 동굴을 마련해 줬다. 낡은 식탁 의자에 이불을 차양처럼 둘러치고 거실 한 구석에 갖다 뒀더니, 줄곧 그 속에서 논다. 저 속에 있으면 도대체 어떤 기분이 들까, 궁금해서 배를 바닥에 납작 붙이고 스밀라의 동굴로 머리를 들이밀어 봤다. 동굴 속은 어둡고, 조용하고, 따뜻하다. 내가 살아가는 번잡스런 현실과 다른 평화로운 세계가 그 조그만 그늘 속에 있다. 고양이가 동굴을 필요로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고경원 길고양이 블로거 catstor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