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80부만 찍고 싶은데요….” 골목 따라 빼곡하게 들어선 인쇄소를 기웃기웃하던 대학생이 어렵게 입을 연다. 하지만 고작 80부란 말에 돌아오는 반응은 싸늘했다. 가는 곳마다 문전박대에 눈물을 삼키며 충무로 인쇄골목을 전전했던 10년 전 그 대학생은, 이제 고양이 달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가 ‘마리캣’으로 살고 있다. 매년 출시되는 마리캣 달력과 다이어리를 모으는 마니아층도 생겨났다.
대학생이었던 2000년부터 고양이를 그리기 시작했으니, 고양이 작가로 나선 것도 올해로 10년째. 대학생 때 중세의 채색 필사본을 보며 섬세한 장식 문양에 매료되었고, 그 문양들은 마리캣의 고양이 그림 속에 하나둘씩 새겨졌다. 동남아시아와 이슬람권 미술에도 관심이 많다보니, 자연스레 동양적이면서도 이국적인 느낌이 그림 속에 배어난다. 여행을 다니며 구입한 수집품이나, 현지에서 스케치한 풍경을 보며 작품의 아이디어를 얻는다.
마리캣의 출근 시간은 달랑 1초. 침실 문을 열고 세 발짝 걸으면 작업실이다. 침실이 바로 옆에 있지만, 작업실에도 접이식 침대를 따로 두고, 일이 많으면 거기서 쪽잠을 잔다. 집에서 작업실을 운영할 경우 느슨해지기 쉬워, 일부러 작업실과 생활공간을 엄격하게 나눈다.
10년을 내리 고양이 그림만 그렸으니 이제 ‘고양이 그림의 달인, 마리캣 선생’이라 불러도 될 법한데, 그는 손사래를 친다. 아직도 자기 그림을 보면 너무 시원찮아 보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단다. 그래서 본격적인 작품을 하지 않을 때도 틈틈이 손을 풀기 위한 그림을 그린다. 고양이의 역동적인 동세나 특유의 표정 같은, 늘 손이 기억해야 하는 그림들이다.
그가 직접 만든 이면지 크로키북 한쪽 면에는 영어교재가 프린트되어 있다. 크로키북을 사다 쓰면 될 텐데 왜 번거롭게 이면지로 만드는지 물었다.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란다. 이유 치고는 좀 거창하지만, 그는 당연하다는 얼굴이다. 아마존 삼림에서 베어지는 나무를 생각하면, 종이부터 아껴야하지 않겠느냐는 거다. 색연필도 손톱만큼 작아질 때까지 깍지에 끼워 쓴다. 앙증맞은 꼬마 색연필 중에는 1cm가 간신히 넘을 만큼 작은 것도 있다.
고양이 한 마리만 키워도 날리는 털이 만만치 않은데, 마리캣네 집에는 고양이가 다섯 마리다. 모두 길에서 데려온 업둥이들인데, 그중에서도 올해 11살이 된 첫째 마리에 대한 애착이 가장 깊다. 마리캣이라는 닉네임도, 회사명인 마리캣그래픽스도 모두 마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마리캣은 마리를 ‘내 영혼의 고양이’라 부른다.
못생기고 엉뚱해서 더 사랑스런 고양이
“보고 있어도 자꾸 보고 싶어요. 진짜 이상하죠? 제가 봐도 참 못생겼는데, 무슨 짓을 해도 예쁜 거예요. 성격도 저랑 비슷해요. 예민하고, 신경질 많고, 꼬장꼬장하고.”
마리캣은 최근 1년간 거의 집밖에 나가본 적이 없다. 한때는 날개 달린 고양이의 모험을 그리는데 쓸 배경 자료를 찾아 베네치아로, 앙코르와트로 훌쩍 여행을 떠났지만, . 종교미술에 관심이 많아 중국 실크로드 석굴군을 여행하는 것이 꿈이었지만, 오래 집을 비워야 하는 해외여행 생각은 아예 접었다. 가끔 경기를 하거나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지는 마리 걱정 때문이다.
“제일 무서운 건, 종이박스 같은 데 올라가 있다가 착지를 못하고 몸이 굳어서 그대로 툭, 떨어지는 거예요. 몇 번을 그래서 너무 놀랐어요. 뻣뻣하게 마비돼서 팔다리도 못 가누고, 그러다가도 멀쩡하게 일어나 돌아다니니…. 마리는 제가 없으면 불안해 해서, 항상 눈에 띄는 데 있어야 해요.”
사람으로 치면 80~90살 할머니뻘인 데다, 최근 친구들이 키우는 고양이가 여럿 세상을 떠난 탓에 더 불안하다. 병원에도 가봤지만, 노환으로 인한 기능장애 탓이라 고치기 어렵다 했다. 애가 타지만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 마리와 함께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하루도 떨어져 있기가 싫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그렇게 몸이 춥대요. 몸 안으로부터 체온이 꺼져가니까, 얼어 죽을 것처럼 냉기가 돈다는 거예요. 그때 제가 없으면 얼마나 외롭고 무섭겠어요. 임종을 못 지키면 평생 한이 될 것 같아서 되도록 집에 있으려고 해요. 마음의 준비를 하고는 있어요. 고양이 나이로는 저만큼도 많이 산 거라고 하니까….”
고양이와 함께 나이를 먹는다는 것
언제나 작고 귀여운 존재로 곁에 남아있을 것만 같은 고양이들. 하지만 고양이도 나이를 먹는다. 인간보다 빨리 어른이 되고, 인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늙어간다. 고양이와 인간은 마치 속도가 다른 무빙벨트를 타고 움직이는 것 같다. 처음에는 고양이가 저만큼 뒤에서 따라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옆에 왔나 싶더니, 나보다 훌쩍 앞질러 가버린다. 인간이 아무리 달려도, 고양이가 늙어가는 속도를 따라잡을 순 없다. 마리캣의 눈에는 마리의 나이가 읽힐까? 어떻게 고양이의 나이를 느낄 수 있을까?
“젊은 애들은 앉아있으면 가슴이 매끈매끈해요. 근데 마리는 앉아있을 때 보면 가슴팍이 움푹하고 울퉁불퉁하거든요. 피부에 지방이나 근육도 없고 털도 푸석해졌죠. 사람도 나이 들면 다리가 가늘어진다고 하잖아요? 얘도 하체에 근육이 하나도 없어요. 배만 볼록하고, 엉덩이도 빈약하고. 전 마리를 보고 ‘아유, 못생긴 년’ 그래요. 그런데 전 마리가 웃기게 생겨서 좋고, 못생겨서 좋아요. 요즘은 늙으니까 응석이 심해져서 아기같이 굴어요. 쓰다듬어주면 팔을 뻗어 제 가슴에 탁 대는데 ‘이거 사람 아니야?’ 싶어요.”
마리캣네 작업실 고양이들은 다들 성격이 드센 편이다. 그래서 마리캣도 마음 고생, 몸 고생을 톡톡히 했다. 집에서 일어난 일을 사실대로 다 이야기하면 못 믿을 정도란다. 심지어 마리 때문에 얼굴 성형수술을 할 뻔한 적도 있다.
“한밤중에 누가 얼굴을 팍 때려서 일어나보니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예요. 마리가 제 얼굴에 도움닫기를 한 거죠. 인중이 대각선으로 찢어졌는데, 고양이가 얼굴 위로 뛰어갔다니까 의사가 믿질 못해요. 다행히 흉은 안 남았지만, 그밖에도 기절할 일이 많죠. 다른 집에서는 1년에 몇 번 일어나기도 힘든 일인데, 이놈의 고양이들은 힘이 너무 넘쳐서 힘들어요. 전 그냥 제 팔자가 세다 그래요.”
마리캣이 일하고 있으면, 고양이 시도는 의자 팔걸이에 네 다리로 아슬아슬하게 서 있거나 ‘여보게, 저승 갈 때 뭘 가지고 가지?’ 하는 것처럼 제 어깨를 앞발로 탁 짚곤 한다. 키가 큰 노마는 직접 두발로 서서 방문 손잡이를 열고 불쑥 들어와 놀래키는가하면, ‘노트북 전원을 빼면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걸 아는지, 자꾸 콘센트를 뽑곤 한다. 유별난 성격의 고양이들과 함께한 세월 때문일까, 마리캣의 고양이 그림에서는 모델이 된 고양이의 생생한 개성이 묻어난다. 단순히 피사체로만 고양이를 보는 사람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지난 1월에는 그간 그려온 그림들을 엄선해 12가지 주제로 묶은 작품집 <캣북>2도 펴냈다. 중세 필사본을 연상시키는 장식 문양 한가운데, 아메리칸 숏헤어 고양이 ‘보리’가 요염하게 누워 있다. 첫 다이어리였던 2004년도 <캣북>의 표지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캣북>의 표지그림은 그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 흰색과 검정색 줄무늬의 대비가 강렬한 보리를 검붉은 바탕 위에 그리면서, 빨강과 검정색에 대한 무의식적인 애착을 깨달았다. 작가에게 있어 '나만의 색'을 찾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작업을 10년쯤 하다 보니 변하는 부분이 있고 변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앞으로도 절대 변하지 않을 건, 보리를 그리며 얻은 ‘색깔에 대한 자각’이다.
‘고양이 미술관’의 꿈
마리캣의 작업실 한 구석 진열장엔 해외여행을 다니며 틈틈이 모은 고양이 장식물이 가득하다. 일본의 여자아이 축제인 히나마츠리 때 장식하는 히나 인형을 고양이 모습으로 만든 것, 베네치아에서 사 온 고양이 마리오네트와 고양이 가면, 고양이로 만든 체스 말…고양이 마니아라면 군침을 삼킬 만한 소장품들이 빼곡하다. 이 소장품은 마리캣의 그림 속에 소품으로 종종 등장하곤 한다.
“제일 애착이 가는 물건이 베네치아에서 산 고양이 마리오네트인데요. 간판도 없고 장사할 마음도 별로 없는 것처럼 생긴 가게인데, 거기 전시된 인형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굉장해요. 베네치아가 《장화 신은 고양이》의 도시잖아요. 그러니까 고양이 기사도, 공주도 있고. 어린애만 한 크기의 고양이도 있었어요. 기본적으로 100만원이 넘는 게 많아요. 거의 보물이죠.”
그가 10년 간 모은 고양이 기념품들이 너무 앙증맞고 귀여워, 박물관이라도 차리면 좋겠다 싶다. 부엉이 박물관, 닭 박물관, 나비 박물관도 있는 마당에, 고양이 박물관이 하나쯤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이야기하니 마리캣도 맞장구를 친다.
“10년은 무척 짧은 시간이에요. 처음 그림 그릴 때 10년은 기본기를 닦아야지 생각하고, 10년이 지나면 되게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거예요. 20대에는 제 브랜드를 갖는 게 꿈이었죠. 이제 30대가 됐으니까 그림의 밀도를 좀 더 높여서 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싶고, 40대에는 고양이미술관을 열고 싶고…. 그게 제 희망사항이에요.”
마리캣이 그린 그림과 소장품을 모아 고양이 미술관을 열면, 꼭 한번 가보고 싶다. 앞으로 10년은 더 기다려야 하겠지만, 그 시간의 무게만큼 탄탄한 밀도를 지니게 될 그림들을 기대하면서. 마리캣의 고양이 미술관에는 그간 선보여온 달력이나 다이어리처럼, 대중적인 물건에 담기 힘든 내밀한 이야기를 담은 그림들도 있을 것이다. 10년 후 어느 고양이 미술관에 걸려있을 그의 그림들을 모두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마리캣을 온전히 만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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