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물건들이 사라진다. 대개 볼펜이나 머리핀, 열쇠처럼 소소한 물건들이다. 집 한구석에 버뮤다 삼각지대처럼
물건이 사라지는 구멍이라도 있는 걸까. 한데 아무리 찾아도 없는 물건들을 내가 잃어버린 게 아니라면, 혹시
누군가 숨긴 거라면? 화가 신선미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아이와 고양이의 눈에만 보이는 장난꾸러기 ‘개미요정’을
상상하고, 이들이 벌이는 한바탕 소동을 유머러스한 이야기 그림으로 풀어낸다.
건망증과 상상력의 유쾌한 결합
어려서부터 수차례 지적받고 신경 쓴 탓에 지금은 좋아졌지만, 작가는 한때 ‘나사 하나 빼놓고 다니는 사람 같다’는
말을 들을 만큼 건망증이 심했다. 툭하면 물건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는데, 그는 그때마다 건망증을 탓하는 대신,
물건들이 감쪽같이 사라진 이유를 맘대로 상상하곤 했다. 호기심이 넘쳐 인간의 물건을 탐내고 엉뚱한 사건을 벌이는
개미요정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증발>(2007)
“어렸을 때 제가 호기심도 좀 많고 엉뚱했어요. 꿈을 꾸다 일어나면 ‘아, 꿈이었구나’ 하고 생각해야 하는데,
전 현실과 혼동하는 거예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그 순간에 뭔가 본 것 같다고 말하면, 이상한 소리 한다고
꾸중도 들었죠. 그땐 어른들 말씀에 수긍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인간이 모르는
존재가 있지 않을까, 그때 본 것도 어쩌면 진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어린 시절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살짝 얼굴을 비쳤던 존재들이 그림에 등장한 계기는 ‘작업실 과자 실종사건’이었다.
그는 2006년경 개인전에 낼 그림을 준비하다 작업실에 과자를 조금 남겨둔 채 자리를 떴다. 한데 다음날 보니
과자가 감쪽같이 사라진 게 아닌가? 결혼 전 작업실에서 혼자 지내던 무렵이라 자신 말고는 먹을 사람이 없었기에
화들짝 놀랐다. 건망증 탓에 기억을 못한 건지, 작업실에 개미가 있었는데 그 녀석들 짓인지, 그것도 아니면 혹시
어렸을 적 보았던 정체불명 존재들이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원대 인물화가 임인발(任仁發: 1255~1328)의
그림 한 점이 머리를 스쳤다.
사라지는 과자와 음료수, 범인은 개미요정?
중국회화사를 공부하면서 임인발의 <장과견명황도>(張果見明皇圖)라는 그림을 본 적이 있어요. 당 현종 앞에 나아간
도사가 도술을 펼치는 장면인데, 그의 모자함에서 인형처럼 작은 노새가 나와서 돌아다니는 그림이 무척 정교하고
재미있었죠. 그 그림에 힘입어서 저도 상상 속에만 간직했던 개미요정을 그림에 등장시켜 봤어요. <건망증>에 등장하는
복주머니는 작업실에 두었던 과자봉지에서 착안한 거예요. 과자를 물고 가는 개미를 상상하면서, 장신구를 가져가는
개미요정을 그린 거죠.”
<건망증>(2007)
작가에 따르면, 개미요정들은 순수함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상상력을 되찾아주는 고마운 존재다. 하지만 신선미의
그림 속 여인들은 대부분 깊은 잠에 빠져 있어 개미요정의 활약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자연증발해 줄어든 주스를 보고
의아해하거나, 사라진 물건을 찾아 온 집안을 뒤질 때도 그것이 개미요정의 소행일 수 있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한다.
심지어 깨어있을 때도 개미요정을 보지 못하는 건, 그들이 이미 상상의 세계로 가는 문을 닫아버린 어른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부분, 2008)
한데 어른의 눈에 보이지 않는 개미요정도 고양이의 날카로운 눈은 피할 수 없다. 고양이는 인간에게 없는 육감을
동원해 개미요정을 찾아내고, 고양이와 딱 마주친 개미요정은 혼비백산 달아난다. 개미요정이 정말 있을지도 모른다는
심증이 굳혀지는 건, 고양이가 가끔 벽 구석이나 침대 밑 으슥한 곳을 빤히 볼 때다. 아무 것도 없는 곳을 인내심 있게
바라보는 고양이는 집요하다. 그러다 갑자기 거실 끝에서 끝까지 내달리곤 하는데, 신선미의 그림을 보노라면
고양이의 느닷없는 ‘우다다 질주’도 개미요정 때문은 아닐까 의심스럽다. 고양이의 이해할 수 없는 질주 본능을
그만큼 절묘하게 담아낸 것이다.
<후>(2007). 쫓고 쫓기는 개미요정과 고양이의 표정이 익살스럽다.
장난꾸러기 고양이의 깜찍한 매력
“고양이가 사람을 경계하는 몸짓 있잖아요. 몸을 바짝 세운다고 그러나? 앙칼진 그 모습이 왜 그리 귀여운지 모르겠어요.
온순한 고양이보다는 튕기는 듯한 모습이 마음에 들어요. 얌체 같고 때론 요염한 눈빛으로 ‘오늘은 또 무슨 사고를 칠까?’
하며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고양이의 매력이죠.”
예측불허 고양이를 모델로 삼다 보니 잊지 못할 소동도 잦았다. 대학교 2학년 때 작업실에 길고양이를 데려다 키우며
모델 삼아 그림을 그렸는데, 귀여운 건 그냥 못 넘기는 작가는 고양이와 함께 놀다 곰팡이성 피부병이 옮기도 했다.
하필이면 고양이와 똑같은 자리에 피부병이 생겨서 놀림도 받았단다.
고양이가 먹물 묻은 발로 사방에 발 도장을 찍으며 달아나는 <천적>이란 그림도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친구들과 함께
고양이 그림을 완성한 뒤에 바닥에 말려놓고 잠시 자리를 비웠는데, 그 사이 작업실 고양이가 그림마다 발 도장을 꾹꾹
찍어버린 것. 게다가 유독 신선미의 그림에는 먹물까지 엎었다. 친구들은 교수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점수를 받았지만,
그의 그림은 먹물투성이가 되는 바람에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 했다.
“고양이가 좋아서 많이 귀찮게 굴었는데 그게 싫었나 봐요. 저만 보면 등을 세우면서 경계하더라고요. 생각해보면
싸우기도 많이 싸웠네요. ‘잡히기만 해봐라’ 하고 쫓아다니다 오히려 고양이에게 골탕먹은 적도 많았어요.
그래도 정이 들었는지, 그때 달아났던 고양이는 잘 지낼까 궁금하고 가끔 생각나요.”
고양이 때문에 그림을 망쳤던 기억도 돌아보면 즐거운 추억이다.
그림 속 고양이의 생생한 표정과 몸짓을 보면 지금도 여러 마리 고양이와 함께 살 것 같은데, 정식으로 고양이를 키운 적은
없단다. 다만 결혼하기 전에 살던 본가 앞 창고가 길고양이 아지트여서 종종 밥도 챙겨주며 데려다 관찰하곤 했다.
집고양이를 그렸지만 표정이나 몸짓에 길고양이의 자유분방함과 거침없는 매력이 담긴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복 입은 여인이 등장하고 섬세한 문양 묘사가 도드라지는 화풍 때문에 초기에는 ‘달력 그림’ 같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신선미는 그림에 독특한 이야기 구조를 담아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액자소설처럼 그림과 그림이 순환관계를 맺으며
이어지는 ‘그림 속 그림 이야기’ 시리즈, 환상과 현실을 절묘하게 결합한 ‘개미요정 이야기’ 시리즈는 대표적 사례다.
또한 휴대폰이나 주스 컵 등 현대적인 소품을 그려 넣어 소소한 파격을 부여했다. 옛 그림에 등장하는 소품들이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전통적인 물건으로 보일지라도 당대에는 유행품이었던 것처럼,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앞으로도 지나치지 않은 선에서 재미와 의미가 담긴 소품들을 숨은그림찾기처럼 그려 넣어볼 생각이다.
일기 쓰듯 섬세하게 그려낸 소소한 일상
“저는 그림일기처럼 제 경험을 담은 그림을 그려요.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이 다 좋은 그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임신했을 때는 태교를 위한 그림도 그렸으니까, 나이를 먹는다면 노인이 된 제 모습도 등장할 거 같아요. 어렸을 때
엉뚱한 상상을 했던 제가 그림 속 댕기머리 소녀가 되어 개미요정을 본 것처럼, 할머니가 개미요정의 존재를 느끼는
모습을 그린 건 그런 이유에서예요. 흔히 치매라 부르는 현상도, 실은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간 게 아닐까요?”
트레팔지에 그린 밑그림을 세워놓고, 어색한 부분은 세부 묘사를 추가한다.
신선미의 활동 분야는 순수회화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가 그린 황석영 소설 《바리데기》(창비)의 표지 그림은
여리면서도 당찬 소녀가 역경을 꿋꿋하게 이겨내는 ‘현대적 바리’의 상을 잘 표현했다는 평을 받았다. 《바리데기》
표지 작업 이후 책 출간이나 포스터 작업도 여러 차례 의뢰받았다. 임신과 입덧 때문에 힘겨워 대부분 고사했지만,
이제 아들 승빈이도 태어나고 여유도 생긴 만큼 출판 작업도 도전해볼 생각이란다. 오는 9월에는 갤러리
선컨템포러리에서 개인전도 예정되어 있다. 고양이처럼 앙큼상큼한 매력을 담은 그의 신작을 기대해본다.
황석영 소설 《바리데기》의 표지그림. 청순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간직한 소설 속 바리의 모습이 생생히 재현됐다.
한중일 삼국의 다도 문화와 전통 복식을 담은 작품과 신선미 작가가 함께 포즈를 취했다. 고양이는 한바탕 소란을 벌이고
달아나, 작가의 품에 쏙 안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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