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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원의 길고양이 통신]/[고양이 여행] 한국

한쪽 발을 지팡이 삼은 길고양이, 보름이

by 야옹서가 2011. 3. 7.
밀레니엄 고양이 일족 중에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길고양이가 있습니다.

왼쪽 눈은 금빛으로 빛나는 태양을 닮았고, 하얗게 변한 오른쪽 눈은 보름달을 닮아

보름달을 눈동자에 담았다는 의미로 '보름이'라 부르고 있는 수컷 고양이입니다.


보름이는 붙임성 좋은 길고양이들과 달리 소심해서, 인기척만 나면 숨곤 했습니다.

태생적인 소심함이 아니라, 어쩌면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생존의 본능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보름이를 외나무다리 위에서 딱 마주친 것입니다.


보통 저 외나무다리에서 눈이 마주치면, 여느 길고양이들은 잽싸게 몸을 180도 돌려

반대편으로 도도도도 달아납니다. 마치 평지를 달리는 것과 같은 속도로, 거리낌 없이

내달리지요. 그러나 보름이는 조심스레 한쪽 앞발로 기둥을 짚고, 천천히 뒤로 이동합니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기에 균형을 잡기가 조심스러운 것입니다.

고양이보다 더 굼뜬 제가 외나무다리 반대편으로 갔을 때까지도, 보름이는 그렇게

천천히 후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저를 흘깃 보더니 다시 그 자세로

반대편을 향해 슬금슬금 나아갑니다. 여전히 한쪽 발은 지팡이처럼 벽을 짚고,

다른 한쪽 발을 외나무다리에 얹은 채로... 한쪽 앞발이 보름이에겐 지팡이입니다.



천천히 멀어지는 보름이의 뒷모습을 보니 어쩐지 나이 든 할아버지 고양이가 지팡이에 의지해 

흐릿한 앞길을 걷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가만히 두어도 알아서 잘 살아갈 것만 같은

녀석들이 있는가 하면, 외나무다리 걷듯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녀석들이 있습니다.

귀엽고 사랑스런 고양이의 모습은 살짝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웃음으로 제 곁을 스쳐지나지만

시간이 지나도 제 마음에 오래 남는 고양이의 얼굴은, 그렇게 고단한 삶을 이겨내고

꿋꿋하게 하루하루를 버티는 고양이의 얼굴입니다.

여간해선 정면으로 보기 힘들었던 보름이의 얼굴을, 오늘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덕에

찬찬히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앞길을 비켜주니 냉큼 뛰어내려 꽁지가 빠져라 잽싸게

달아나는 보름이. 다음에 만날 때는 보름이가 좀 더 편한 표정을 짓고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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