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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원의 길고양이 통신]/[고양이 여행] 일본

일본 공동묘지에서 열린 고양이 만찬

by 야옹서가 2008. 8. 25.

화려한 식탁도 진수성찬도 없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따뜻해지는 고양이 만찬. 만약 일본여행 중에 야나카 레이엔(谷中霊園)을 들를 기회가 있다면, 운좋게 그 광경을 목격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일본의 유명한 공동묘지 야나카 레이엔에서 열린 '고양이 만찬' 장소를 찾아가봤다.

일본에서 길고양이를 만날 확률이 높은 곳을 세 군데만 꼽으라면 단연 묘지, 절, 주택가 골목이다. 골목이야 한국에서도 길고양이 많기로 유명하지만, 묘지나 사찰에 길고양이가 있다는 건 의외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외진 곳에 있는 데다 인적도 드물어 먹을것도 없어 보이는 한국 묘지와 달리 주택가 한가운데서도 묘지를 흔히 볼 수 있어, 머물 곳이 마땅치 않은 고양이들의 쉼터로 애용된다. 특히 길고양이를 돌보는 사람들의 손길은 이들 묘지 고양이에게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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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노테선 닛포리역 서쪽 출구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야나카 레이엔은 10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대지에 약 7천 기의 무덤이 빼곡히 들어차 그 방대한 규모를 실감케 한다. 길고양이를 만나러 묘지 한가운데로 멋모르고 깊숙이 들어가다가, 자칫하면 묘지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묘지 중간중간에 현재 위치와 출구를 알려주는 지도가 있을 정도다. 헨젤과 그레텔처럼 빵조각이라도 떨어뜨리며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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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5분쯤 걸었을까 싶은데, 나무 그늘에 고양이들이 누워 있다. 해코지할 사람이 없으니 고양이의 자세도 여유롭기 그지없다. 무성히 자란 잡풀을 쿠션 삼아 한팔을 척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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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를 가져 배가 불룩한 줄무늬 고양이는 발랑 드러누워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을 가만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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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에 건너편 비석 앞에 앉아있던 녀석이 슬그머니 일어나 자리를 옮기더니, 내 앞에 털썩 드러눕는다. 은근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고양이;;; 낯선 사람의 침입에도 아랑곳없이 여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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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셔터를 누르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등장하셨다. 모자에 조끼까지 갖춰 입으신 모습을 보고 혹시 묘지 관리인 할아버지일까 싶었다. 그게 아니라도 만약 참배하러 온 참배객이라면, 고양이와 함께 무덤 앞에서 놀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꾸지람을 하시진 않을까, 조심스런 마음에 한걸음 물러나 건너편 무덤가에 앉았다. 한데 할아버지가 자전거 짐칸에서 주섬주섬 꺼낸 것은 꽃다발이나 제수 음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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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통조림만 한 참치캔 하나, 나뭇결 무늬가 그려진 스티로폼 그릇 세 개, 그리고 한 벌의 나무젓가락. 할아버지는 담담한 얼굴로 그것들을 비석 앞에 주섬주섬 꺼내어 늘어놓으셨다. 아까부터 뭔가를 기다리는 듯하던 고양이들이 꼬리를 한껏 치켜들고 할아버지 앞으로 다가서더니 얌전히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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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있으니 새로운 얼굴이 하나 더 등장. 할아버지는 스티로폼 그릇을 하나 더 꺼내어 삼색고양이를 위한 만찬을 준비하신다. 고양이와 대화를 나누며 친근한 눈으로 바라보는 모습이, 고양이 만찬을 준비해 온 것이 오래 전부터 계속해온 일상인 듯했다. 고양이가 밥을 다 먹고 나서 행여나 쓰레기가 뒹굴까 싶어, 깔끔한 뒤처리를 위한 비닐봉지까지 준비해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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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 가진 고양이가 참치를 찹찹 맛있게도 먹는다. 길고양이를 찍으러 다니면서 고양이를 만날 때마다 간식거리를 나눠주면서도, 흙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먹는 게 안타깝다고만 생각했지, 휴대용 밥그릇을 준비해 줄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조금만 마음을 더 썼다면 이런 방식도 가능했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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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깨끗한 밥 먹고 싶다옹! 할아버지 덕분에 맛난 밥을 먹는다옹~" 날 돌아보는 고양이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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