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취재기사 | 칼럼/박물관 기행

세계 장신구 박물관

by 야옹서가 2005. 10. 11.
 1978년, 내전 중인 아프리카 대륙에 뚝 떨어진 29세의 한국 여인이 있었다. 에티오피아 외교관으로 발령 받은 남편을 따라 먼 이국 땅을 밟은 여인은, 전쟁으로 어수선한 현지 시장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검은 벨벳처럼 윤기 흐르는 에티오피아 여인의 목에 빛나는 은 목걸이 한 점. 대대로 물려져 내려온 세월이 응축된 그것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다. 여인은 번개 맞듯 장신구의 매력에 눈떴다. 첫눈에 반한 사랑이었다. 종로구 화동에 아담하게 자리한 세계장신구박물관(www.wjmuseum.com)의 씨앗은 1970년대 에티오피아의 한 시장에서 그렇게 싹텄다.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강원 박물관장은 25년 간 8개국 외교관으로 활동했던 김승영 전 대사와 함께 세계를 다니며 장신구를 모았다. 그의 수집품 중에는 주로 그 나라의 생생한 숨결을 담은 재래시장에 나가 발견한 것들이 많았다. 6ㆍ25전쟁 때 한국의 어머니들이 아끼던 패물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듯, 내전 중인 아프리카에서도 간혹 그런 이유로 귀한 장신구가 매물로 나오곤 했다. 하나같이 사연 있는 물건들이었다. 죽어도 팔지 못하겠다던 사람들이, 가난 때문에 생살 떼어내듯 장신구를 풀어 건네는 모습은 애틋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귀한 장신구를 얻는 순간마다 희열도 느꼈다.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현지 언어도 적극적으로 배웠다. 그를 낯선 동양인으로만 생각하던 현지인들도 열성적인 모습에 마음을 열었다. 이 관장은 이렇게 어렵사리 모은 장신구 1,000여점으로 2004년 5월 세계장신구박물관을 개관했다.

세계의 보석함과 같은 박물관
장신구박물관이란 성격에 걸맞게 박물관 건물의 건축미도 탁월하다. 건축가 김승회가 설계한 건물은 빗살무늬의 구릿빛 외벽, 은빛으로 빛나는 문, 금빛의 박물관 로고가 어우러져 단단하고 정교한 보석함을 연상시킨다. 내부 면적은 70여평에 불과하지만, 각 벽면마다 컨셉을 정해 장신구를 빼곡하게 전시하는 인테리어로 전시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안내데스크가 있는 1층과 2층 전시실 사이에 아담하게 자리 잡아 1.5층에 가까운 1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이 관장이 ‘장신구 꽃밭’으로 명명한 9개의 큐브가 어둠 속에서 관람객을 맞이한다. 양옆으로는 원형을 모티브로 한 ‘호박의 집’과 사각형을 모티브로 디자인된 ‘팔찌와 반지의 벽’이 호위하듯 이들 큐브를 둘러싸 아늑한 느낌을 준다.

세계 각국의 화려하고 큼직한 목걸이를 소개한 ‘세계의 목걸이 방’은 본 박물관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이밖에 남미 원주민들의 뛰어난 금 세공기술을 보여주는 ‘엘도라도의 방’, 두 개의 긴 원이 서로 꼬인 에티오피아 십자가를 비롯해 각종 십자가 장식이 빼곡한 ‘십자가의 방’, 어느 하나 소홀히 지나칠 만한 것이 없다.

2층에서는 ‘근대 장신구의 방’이 눈길을 끈다. 마치 금속으로 만든 대나무 숲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전시 공간은 기존의 박물관에서 보기 힘든 파격적인 디스플레이라 더욱 새롭다. 아르누보, 아르데코 스타일의 장신구를 비롯한 현대 장신구들이 기둥 속에서 고요히 빛나고 있다. 또한 ‘비즈와 상아의 방’에서는 아프리카인들이 150년 간 1,500만명의 노예와 맞바꿀 만큼 좋아해 ‘트레이드 비즈’란 별칭까지 얻었던 유리구슬 장신구가 즐비하다. 당시 베니스에서 제작되고 아프리카로 건너간 이 구슬을 오늘날 다시 구하기 위해 유럽인들이 비싼 값을 주고 아프리카에서 되사들여 간다니, 역사의 순환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삶의 중요한 순간에서 빛났던 장신구
그러나 이런 장신구를 단순히 몸치장 도구로만 감상하면 곤란하다. 이 관장은 “장신구가 말을 한다”고 설명한다. 이를 착용한 사람이 처녀인지 기혼녀인지, 어떤 신분을 지녔는지 증명해줄 뿐 아니라, 장신구가 제작되고 소비되었던 민족의 생활사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성인식, 결혼, 장례 등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장신구를 사용했지요. 유목민들의 경우 부동산이나 가구를 지닐 수 없는 대신, 텐트와 장신구에서 사치를 부렸어요. 몽고, 티벳, 아프리카 북부 사막 같은 곳에서는 장신구가 가내은행 역할도 했어요.”

나라마다 장신구에 쓰이는 재료도 달라서, 아프리카는 청동과 은이 많이 쓰인다. 특히 모슬렘 국가에서는 금을 사악한 금속으로 여기고 은을 신성시했기에 은제품이 많다.

반면 남미는 금을 유독 많이 사용하고, 북미에서는 터키석 장신구가 종종 눈에 띈다. 특히 옷을 많이 입지 않는 곳일수록 장신구 문화가 더욱 화려하게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유물 중에서도 장신구에 녹아든 세월의 의미는 특히 각별하다. 늘 귀하게 어루만지고 닦으며 맨살과 부대껴온 물건인 만큼, 소유자의 혼이 깃들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대로 물려 내려온 집안의 가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비단 귀금속이 아닌, 나무와 동물 뼈를 깎아 만든 것일지라도 소유자의 삶과 역사가 스며 있다면, 값비싼 다이아몬드 반지의 금전적 가치와 비할 수 없는 무형의 가치가 담겨 있을 것이다. 이들 장신구 속에는 이미 사라진 세계, 그리고 지금도 사라지고 있는 세계의 얼굴이 고요히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7시, 월요일 휴관
* 관람요금 일반 5,000원, 대학생 이하 3,000원
* 문의전화 02-730-1610


'취재기사 | 칼럼 > 박물관 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동 하회동 탈 박물관  (0) 2005.11.13
김치박물관  (0) 2005.11.07
유럽자기박물관  (0) 2005.08.29
국악박물관  (0) 2005.08.17
삼성어린이박물관  (0) 2005.08.1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