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 26. 2001 | 6월 28일부터 8월 15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제2전시실에서 개최되는 ‘올해의 작가 2001 전광영전’에서는 그의 초기 평면추상회화 10여 점을 비롯, 간결한 화면 속에 한국적 정서와 현대적인 간결미를 살린 한지 오브제 작품 ‘집합’연작 등 총 50여 점이 전시된다. 화면에 다닥다닥 붙은 수백 개의 한지 오브제가 만들어내는 담담한 색조의 화면은 한국적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시도로 평가된다.
전광영의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는 삼각형의 조그만 한지 오브제다. 삼각형으로 자른 스티로폼을 한지로 감싼 뒤 종이끈으로 묶어서 화면에 촘촘하게 붙여 마무리한 한지 오브제는 한약 봉지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생필품을 새끼줄로 묶어 매달았던 옛사람들의 일상생활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고문서가 인쇄된 한지를 사용해 글자가 조밀하게 인쇄된 부분은 회색을 띠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미색을 띠는데, 따로 채색을 하지 않더라도 종이 자체의 미세한 농담만으로 화면에 강약을 주어 멀리서 보았을 때 잔잔한 수묵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는 각각의 작품에 ‘집합’이라는 공통분모를 던져놓았을 뿐, 일련번호를 연상시키는 숫자와 알파벳을 이용한 제목으로 관람객이 상상을 통해 작품에 감정이입할 수 있게 했다.
차곡차곡 다진 표면에 함축된 시간의 흔적
이처럼 단순하고 소박한 한국적 정서를 독특한 한지 오브제로 표현한 그의 작품은 국내보다 해외 아트페어에서 먼저 호평을 받았다. 전 작품이 팔린 1997년 시카고 아트페어를 시작으로 2000년과 2001년에 열린 바젤 아트페어에서도 작품 매진을 기록했다. 뒤늦게 상업작가의 대열에 들어선 그가 모처럼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쳐놓을 수 있는 전시가 이번 ‘올해의 작가전’인 셈이다.
전광영의 작품을 보면 그의 성공이 단순히 서구의 오리엔탈리즘 취향에 힘입은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초기의 ‘집합’ 연작은 고슴도치 털처럼 촘촘하게 달라붙은 한지 오브제가 유사한 크기와 방향을 유지하고 있어 다소 경직된 모습이지만, 최근작은 각각의 오브제 크기에 변화를 주고, 붙일 때도 평평하게 눕히는 방법과 세우는 방법을 병행하며 리듬을 준 것이 돋보인다. 예를 들어 2001년 작품‘집합 001-AP040’를 보면 1990년대 중반 작품에서 볼 수 있었던 일괄적인 크기의 큰 오브제는 사라지고, 엄지손가락만한 크기의 올망졸망한 오브제가 화면을 조밀하게 채운다. 저마다 조금씩 모양이 다른 수천 개의 한지 오브제가 다져지듯 평평하게 쌓이다 어느 순간 불쑥 튀어나오거나 깊이 파묻히면서 미세한 동세와 독특한 질감을 나타내는 것이 전광영 작품의 매력이다. 고된 수작업을 거쳐 하나하나 만들고 차곡차곡 쌓아올린 오브제는 오랜 세월을 견뎌낸 거대한 암벽의 표면이나 고목을 연상시킨다.
동양적 소재주의 넘어 독특한 자기세계 구축
특히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된 세 점의 대형 설치작품은 평면작품에만 머물렀던 그의 작가적 역량을 실험하는 새로운 시도다. 전시장 중간의 작은 방에 매달린 지름 3m의 구체는 불규칙한 크기의 한지 오브제로 둘러싸여 있어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유성을 연상시킨다. 또한 전시의 마지막을 장식한 설치작품은 어둠 속에 높이 3m, 지름 1m의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12개의 원기둥을 줄지어 세우고 바닥에 한지 오브제를 깔아 마치 고대 신전의 기둥을 연상시키는데, 이는 영원한 것 혹은 초월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최근의 주제의식이 적절히 표현된 예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김연희씨는 “전광영은 한지라는 매재를 통해 독특한 동양적 정서와 서양의 현대적 조형논리를 함께 소화해내면서 ‘한지 오브제를 통한 미니멀리즘’이라는 그만의 창조적 형상화에 성공했다”며 작품의 의의를 평가했다. 한문이 씌어진 고서적과 한지를 이용하되 동양적인 소재주의에 그치지 않고 독특한 조형양식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전광영의 사례는 작가적 명성의 유무에 개의치 않고 꾸준히 작업중인 작가들에게 힘을 실어준다. 입장료 성인 700원, 학생 300원. 02-2188-6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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