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 28. 2001 | ‘씨네키드’란 필명으로 유니텔 영화동호회에서 활동하며 틈틈이 영화 감상문을 올렸던 젊은 임상심리학자가 있었다. 정식으로 평론을 공부하진 않았지만 자신을 한번 시험해보고 싶었던 그는 1998년 씨네21 영화평론상에 도전했고, 얼마 후 당선 소식을 듣자 즉흥적으로 ‘심영섭’이란 필명을 지었다. 임상심리학자 김수지가 영화평론가 심영섭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한 순간이었다.
“전 이름 속에 우주가 담겨있다고 봐요. 제 필명을 ‘심리학과 영화를 두루 섭렵한 사람’의 약자라고도 하는데, 원래는 마음 심자, 그림자 영자, 넓을 섭자를 써서 ‘마음의 그림자가 넓다’는 뜻이에요. 물론 마음 심이란 성은 없지만요. 사람들은 제가 굉장히 자기주장적이고 활달하고 외향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제 그림자인지, 아니면 제 안에 있는 여성스럽고 상처받기 쉬운 것이 제 그림자인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 글을 보면 그 두 가지가 다 드러나요. 애니무스적 요소가 주도해 쓴 글은 무척 활달하고, 그에 반해 애니마적 요소가 주도한 글 중에는 한없이 슬프고 정서적인 경향이 있죠.”
정신분석학적 요소가 짙게 깔린 영화평론집
이 같은 설명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심영섭씨의 글 면면에는 정신분석학적 요소가 짙게 깔렸다. 그가 등단한지 3년 만에 펴낸 첫 평론집 《영화, 내 영혼의 순례》(세상의 창)의 1부에 수록된 글들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대변, 소변, 정액, 설사 등 저급 화장실 유머가 난무하는 ‘오스틴 파워’를 보고 ‘초자아가 지배했던 1980년대를 부정하는 21세기적 영화’로 해석하는 식이다. 46편의 평문을 5부로 나눠 수록한 평론집은 정신분석적 평론 외에도 작가론 분석, 장르론 분석, 텍스트 비교분석 등 다양한 영화읽기 방식이 소개됐다.
“이번에 수록된 평문들은 각 편마다 원고지 30매가 넘고, 정석 비평에 가까운 글들이에요. 정신분석이 제 전공이지만, 본격적으로 영화비평을 공부하거나 영화를 깊이 있게 보려는 분들을 위해서 다양한 분석기법을 수록했죠.”
특히 작가론으로 영화를 분석한 2부에는 이례적으로 김기덕 감독의 작품에 대한 글을 2편이나 실어 눈길을 끈다. 이에 심영섭씨는 한국의 여러 감독 중에서도 특별히 김기덕 감독에 대한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제가 김기덕 감독의 어떤 면에 대해서는 전혀 찬성을 못하고, 서로 팽팽한 긴장감이 있는 경우예요. 앞으로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한편으론 뭔가에 갇혀 있고 아직도 그 세계를 깨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좀 더 시간이 지나면 김기덕 감독의 정신분석과 함께 왜 그런 영화가 나올 수밖에 없는지 연구한 책도 내보고 싶은 마음이 있죠. 대신, 영화 잘 만들면 그렇게 할거고, 아니면 안 할 거예요. 그런 책을 내는 건 평론가로서는 굉장한 헌신을 하는 건데, 그만큼 가치가 있는 감독이어야 하니까요.”
2차원에 사는 이가 3차원을 보듯, 새로운 시각으로 영화보기
1부부터 4부까지가 진중한 평문이라면, 5부는 심영섭씨가 평론가로 등단하기 전 ‘씨네키드’란 필명으로 통신동호회에 기고했던 글을 묶었다. 일상적인 말투로 읽어낸 영화 속 풍경은 한 아마추어 동호인이 영화평론가의 길을 걷기까지 밟아온 글쓰기의 궤적을 보여준다.
“통신동호회 시절엔 영화 속의 상징이나 사회문화적인 의의를 다루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어요. 그런데 임상심리학자로 일하면서 본 환자들과 영화를 비교하면서 본격적으로 영화 분석에 관심을 갖게 됐죠. 예를 들면 환자들이 자아를 상실했을 때 느끼는 심상이 다리가 부러진 걸로 나타날 때가 있어요. 그런데 히치콕의 ‘이창’을 보면 남자주인공의 다리가 부서진 걸로 시작이 되죠. 남성성이 상실된, 거세된 무력한 주인공인 거예요. 그런 걸 깨닫고 굉장히 놀랐죠. 그 다음부터는 2차원적 세계에 살던 사람이 3차원의 세계를 본 것처럼 영화가 예전과 전혀 다른 차원으로 보이고, 일단 그렇게 보이기 시작하니까 글을 쓰고 싶었죠.”
영화를 보는 다른 시각을 발견하게 되면서 심영섭씨가 평론에 애착을 갖게 됐듯, 궁극적으로 그가 바라는 것도 영화를 보고 글을 쓰면서 자신이 느꼈던 경이로움을 독자들과 공유하는 것이다. 한 편의 글을 통해 독자들이 영화의 정서를 새롭게 체험하게끔 인도하고, 세상을 보는 또 다른 시각을 줄 수 있다면 평론가로서 더 이상 바랄 게 있을까. 이는 삶의 과정에서 의미를 가장 중시한다는 심영섭씨의 희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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