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나》 2005년 봄호 | 오래된 물건에는

그 물건이 견뎌 온 세월만큼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물건들이 버려지면 그 속에 숨은 이야기도 함께 버려진다.

하지만 쉬 잊히고 버려지는 사물의 쓰임새를 찾아내

연극적 오브제로 탈바꿈시키는 이들이 있다.

바로 공연 창작 집단 ‘뛰다’ 단원들이다. 오래된 물건 속에 깃들었다

깊은 밤 뛰쳐나와 신명나는 놀이판을 벌이는 도깨비처럼, 

무대에 서면 단원들은 장난기 넘치는 밤도깨비가 된다.





극단이란 수식어 대신 굳이 ‘공연 창작 집단’임을 표방하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 이들은 연기, 연출은 물론 무대 예술, 의상 디자인까지 직접 해낸다. 버려진 생수통, 찌그러진 양재기와 양은 냄비, 모서리가 닳은 나무 빨래판 등 천덕꾸러기 낡은 물건들은 ‘뛰다’의 손을 거쳐 독특한 무대 예술품으로 탈바꿈한다. 평범한 사물 속에 숨은 재미난 형상을 발견해 내고, 재활용품 악기와 가면으로 변신시키는 이들의 솜씨는 가히 “오브제의 마술”이라 부를 만하다. 이 악기들은 무명, 삼베, 지푸라기 등 친환경적 소재를 활용해 제작한 무대 속에서 더욱 빛난다.

버려진 사물들이 들려주는 태고의 소리
“첫 공연인 <상자 속 한 여름밤의 꿈>(2001년)부터 사물을 악기로 썼어요. 빈 생수통을 장구 대신 썼는데 예상외로 반응이 좋았어요. 실은 장구를 무릎 사이에 끼고 치다가, 너무 힘을 줬는지 으스러지는 바람에 급조한 거였지만요.”

연출자 배요섭(36)이 악기에 숨은 사연을 털어놓자, ‘장구 사건’의 주인공인 배우 최재영(30)이 “공연이 아니고 차력이야, 차력” 하며 너스레를 떤다. 이처럼 우연한 계기로 재활용품 악기를 쓰기 시작했지만, 이제 환경친화적인 재료를 지향하는 것은 ‘뛰다’의 공연 철학이 됐다. 이들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하륵 이야기〉(2001년) 때는 아예 악기 없이 물건들만으로 연주를 해 내기도 했다. 악사들이 연주뿐 아니라 가면놀이꾼, 이야기꾼으로 종횡무진 활약하는 이 공연에서 재활용품 악기는 주연 배우 못지 않은 힘을 발휘한다. 언뜻 보기엔 볼품 없어 보이지만, 식당에서도 밥은 뒷전인 채 밥그릇과 컵을 두들기는가 하면, 고물상을 뒤지기도 한 끝에 발견한 악기들이라 더욱 정이 간다고.

대사와 노래 사이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뛰다’의 공연에는 우리 고유의 리듬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즉흥 연습을 하면서 쉼 없이 두드리고, 장단을 맞추며 가락을 만들고, 그렇게 찾아 낸 소리를 단원들이 자연스럽게 체화시키는 데에 1년이 걸렸다. 또한 틈 틈이 탈춤과 풍물을 몸에 익혀 흥겨운 추임새와 우리 고유의 가락이 몸짓에 자연스럽게 배나오도록 했다. 처음에는 대사를 치면서 동시에 악기를 연주하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이렇듯 숙성 과정을 거쳐 태어난 뛰다의 공연은 역설적으로 “오래된 것의 새로움”을 보여 주었다. 사소한 듯하지만 손때 묻은 것, 오래된 것에 대한 애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곰삭은 이야기에 담긴 원형의 힘
“단원들이 다들 오래된 걸 좋아해요. 어딜 놀러 가도 안동 하회마을처럼 예스런 곳이 좋고, 물건도 오래된 물건이 좋고. 이야기도 오래되어야 맛있잖아요? 그런 ‘오래된 것’ 안에 있는 힘이 공연에도 반영되나 봐요.” 대표 황혜란(34)이 들려 주듯, 이들의 관심은 전통 설화나 신화 등 초월적 힘이 담긴 이야기를 형상화하는 쪽으로 이어진다.

“돌아보면 우리가 관심을 갖고 좋아하는 것들이 근원적이고 원형적인 힘과 관련 있지 않나 싶어요. 작품마다 다르긴 하지만 <하륵 이야기>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탈은 한국 탈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어요. 간혹 아시아나 아프리카 민속품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고요.”

연출자 이현주(34)도 한마디 거든다. 특히 인형과 가면은 ‘뛰다’의 공연에서 배우들의 표현 영역을 확장시키는 중요한 장치로 기능한다. 굳이 정극을 지향하기보다, 여러 가지 오브제를 활용해 연극적 재미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예컨대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토대로 한 <상자 속 한 여름밤의 꿈>에서 조그만 골판지 인형은 인간 세상의 유한함을 표현하는 매개체가 됐다. 반면 인형을 조정하는 정령은 등신대보다 거대하게 묘사해 초현실적인 느낌을 줬다. 크기가 전도된 인형과 인간이, 발상의 전환을 유도하는 매개체로 작용하는 것이다. 1999년 독일 에른스트부쉬 연극학교 인형극학과 교환학생으로 활동했던 연출자 배요섭은 ‘인형이 등장하는 공연은 아동극’으로 치부하는 고정관념에 일침을 던진다.

“인형이 아이들만을 위한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그보다는 연극적으로 탐구해 볼 만한 새로운 매체로 보고, 인형을 어떻게 연기하느냐에 대해 여러 가지 실험을 하게 되죠.”
그의 이런 생각은 거대한 팝업 북 형식의 무대에 닥종이 인형을 등장시킨 <커다란 책 속 이야기가 고슬고슬>(2002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밖에도 도깨비와 인간이 아옹다옹 풀어 내는 이야기보따리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꾸민 <또채비 놀음놀이>(2003년) 등 다양한 오브제를 활용한 ‘뛰다’의 공연 형식은 늘 화제가 됐다.
 
구체적인 형상을 지닌 오브제뿐 아니라 소리, 빛과 같은 무정형의 요소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이들 공연의 중심 축은 푹 곰삭아 구수한 맛이 배어나는 옛 이야기다. 아이들은 이야기 속 기상천외한 모험담에 자지러지고, 어른들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듯했던 어른과 아이는 한 편의 이야기 속에서 공감대를 찾아 나간다. 실험성이 돋보이는 ‘뛰다’의 공연이 다양한 연령층을 아우르는 가족극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열린 무대를 향하여
창단 이래 매년 한 편 꼴로 새로운 공연을 선보였던 ‘뛰다’단원들은 올해부터 레퍼토리 시스템을 도입할 예정이다. 기존 단원과 별도로 공연 팀을 새롭게 뽑아 창작 시스템과 공연 시스템을 병행하는 것. 양질의 공연을 계속해서 창작해 내기 위한 시도인 셈이다. 새롭게 구성된 공연 팀은 오는 11월부터 내년 7월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하륵 이야기> 상설 공연을 갖고, 기존 단원들은 새 공연 <햄릿>을 준비하게 된다. 수많은 극단에서 무대에 올렸던 햄릿이지만, 이들이 선보이는 공연은 주인공인 햄릿의 시점이 아니라 익살 광대들의 희극적 관점에서 재연되는 일종의 ‘뮤지컬 퍼핏 플레이(음악 광대극)’가 될 예정이다. 특히 <햄릿> 은 경기도와 경남 지역 대안고등학교를 순회하며 공연할 계획이다. 산골 분교, 섬마을 초등학교 등 문화 소외 지역을 찾아다니며 나눔의 공연을 펼쳤던 기존 활동의 연장선이다. 이 밖에 6월 1일부터 9월 4일까지 서울 대학로 사다리극장에서 펼쳐질 <하륵 이야기> 공연에서도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여력이 되면 무대뿐이 아닌 ‘뛰다만의 공간’을 마련해 관객을 초대하고 싶다는 뛰다 선수들. 지금의 연습실은 주택가 2층 건물에 있어 여름에 창문도 못 열고 연습하지만, 언젠가 서울 근교의 폐교를 개조한 숲속 작업실을 마련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는 체험 공간을 꿈꾼다. 연습실이 곧 공연 무대가 되는 공간을 꿈꾸는 이들의 소박한 바람이 이뤄지길 기원해 본다.  

공연 창작 집단 '뛰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출신 연출자와 배우들이 모여 2001년 2월 결성하였다. 대표 황혜란(34, 배우), 배요섭(36, 연출), 이현주(34, 연출), 김덕희(32, 기획), 윤진성(35, 배우), 최재영(30, 배우), 박지선(33, 작가) 등 상근단원 7명과 비상근단원 6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륵 이야기>와 <커다란 책 속 이야기가 고슬고슬>로 2002년, 2004년 서울아동청소년공연예술축제 4개 부문을 수상하였다. 열린 연극, 자연친화적 연극, 문화 소외지역을 찾아가는 연극을 지향하는 '뛰다'의 모습은 http://tuida.com에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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