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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사 | 칼럼/인터뷰

인간의 원초성 탐색하는 영원한 여행자-연출가 양정웅

by 야옹서가 2005. 12. 3.

[문화와나 2005년 겨울호] 인류 최초의 무대, 그 위에서는 어떤 난장이 펼쳐졌을까? 필시 몸짓과 춤과 노래가 언어 대신 넘쳐났을 것이다. 리듬을 타고 치솟았다 급격히 하강하는 몸의 궤적이 보는 이의 심장을 뛰게 하고, 발끝에서 가슴까지 진동하는 소리의 울림이, 울긋불긋 원초적인 자채가 몸을 뜨겁게 달구었을 것이다. 연출가 양정웅(37)이 지향하는 이미지극은 이처럼 인간에게 내재한 원형질을 건드리고 일깨우는 힘을 지녔다. 

‘언어를 넘어선 이미지극’, ‘서양 고전 연극과 동양적 연극 전통의 접목’…. 주목할 만한 차세대 연출가로 빈번히 거론되어 온 양정웅의 연극을 설명할 때 인용되는 수식어다. 만국 공용어인 몸의 언어에 기댄 그의 연극은, 서구 철학에 기반한 논리와 이성으로 대변되는 근대 연극과 다른 지점에 있다.

양정웅이 애착 가는 작품으로 손꼽는 일련의 창작극을 보면, 그가 지향하는 연극의 종착점을 확인할 수 있다. 초기작인 <대지의 딸들>(1999년)은 양정웅 연극의 모태가 되는 이미지극이다. 세상의 모든 딸들이 연달아 태어나는 장면, 여성과 관련된 욕설 세례로 여성에 대한 언어 폭력을 시각화한 장면,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남성 폭력 등 분절된 이미지가 마치 조각보처럼 이어지는 이 연극은, 휴머니즘에 바탕을 두고 여성 문제를 깊이 있게 담아냈다.

 윤회 사상을 바탕으로 죽음과 삶, 결혼 등의 제의적 순간을 아우른 <연 카르마(緣 Karma)>(2001년)도 빼놓을 수 없다. 2003년 《카이로 국제실험연극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 연극은 씻김굿, 원무, 승무, 상여 소리 등이 어우러진 총체극으로, 2004년 《과천마당극제》 참가 당시 이색적인 야외 공연으로 인상 깊은 경험을 남겼다. 극 속의 장례 행렬이 사당에서 출발해 계곡을 따라 이동하면서 물 위 무대로 옮겨가는 동안, 관람객들은 바위 위에서 그들의 공연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처럼 입체적으로 구성되는 양정웅의 연극 세계는, 연출가 이전에 영화 감독과 연극 배우를 꿈꾸던 젊은 시절에서 우러나온다. 영화감독이 자유자재로 이미지를 편집하듯, 그는 무대 위에서 배우들의 몸짓을 편집하고 이미지를 재구성해 왔다.

 양정웅은 극단 동랑레퍼토리의 청소년 연극아카데미 1기 출신이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연극 무대에 선 셈이다. 극단 동랑레퍼토리가 셰익스피어 원작의 <햄릿>을 번안한 <하멸태자>(1976년)로 화제를 모은 곳임을 감안하면, 고전 연극과 현대극의 접목을 시도한 실험극의 싹은 이 무렵 이미 발현되었는지 모른다.

그는 입시를 준비하면서도 배우를 꿈꿨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낮에는 수업을 듣고, 밤이 되면 대학로에 나가 연극 포스터를 붙였다. 졸업 후에는 비극장 공연에 매료됐다. 이는 1992년 장흥 토탈미술관에서 젊은 연극인들과 의기투합해 참여했던 《푸른연극제》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공연장은 물론이고 카페에서도, 심지어 산이나 강에서도 공연했다. 실험적 연극을 모색하던 그에게 새로운 전기가 된 것은 다국적 극단 ‘라센칸(Lasenkan International Theatre)’과의 만남이다. 당시 《창무국제예술제》에서 열린 워크숍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라센칸에 합류해 1994년부터 1996년 초까지 세계 각국을 돌며 연극 배우로 활동했다.

집시처럼 세계를 떠돌며 연극하는 삶을 꿈꾸던 양정웅이 한국에 돌아온 계기는 라센칸과의 공연을 마치고 혼자 떠난 8개월간의 인도 여행이었다. 히말라야 오지를 떠돌고, 인도 극단과 함께 뭄바이(옛 봄베이) 국립 극장에서 공연하면서, 모국어로 연기하는 연극에 대한 갈망이 새삼 사무친 것이다. 귀국 후 1997년 극단 여행자를 창단하며 연출가로서 선보인 일련의 연극은, 다양한 국가의 문화를 경험하며 배우로 활동하고, 몸으로 연극을 받아들이던 시절의 경험이 스며 있다. 한데 왜 극단 이름을 ‘여행자’로 정했을까.

 “20세기 가장 훌륭한 연출가 중 하나인 폴란드의 예르지 그로토프스키(Jerzy Grotowski, 1933~1999년)가 ‘연극은 만남이다’란 말을 했어요. 사람과 만나고, 작품과 만나고, 장소와 만나 이뤄지는 예술이 연극이죠. 그래서 극단 이름도 여행자란 말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여행 역시 만남이니까요.”   

일상적 공연장을 넘어 야외로 향하고, 객석과 무대가 극적으로 뒤섞이는 그의 연극은 마당놀이와 같은 전통 연희의 연장선상에서 해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굳이 자신의 연극을 ‘한국적’이라는 수식어로 얽매지 않는다. 언어는 사고를 규정하고, 자유를 구속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아시아 연극의 전통 쪽으로 시각을 넓히고 싶어 한다.

 “근대 이후의 서양 연극은 서양 철학에 입각한 논리와 이성에 의해 주도돼 왔어요. 그에 비하면 동양 연극은 보다 원초적이고 제의적   이죠. 기본적으로 아시아의 연극은 음악과 춤과 미술로 어우러지는 하나인 총체극이었잖아요? 그런 과거의 원형을 현대에 다시 실현하고 싶어요.”

이런 그의 의지가 집약된 최근의 화제작은 단연 <한여름밤의 꿈>이다. 첫 공연이 열린 2002년 이래 매년 새로이 무대에 올려져 온 이 작품은, 지난 8월 영국 에든버러의 《프린지 페스티벌》에 참여했다가 ‘유럽 공연 예술계의 허브’로 불리는 영국 바비칸 센터(Barbican Center)에 초청받는 쾌거를 올렸다. 두루마기를 연상시키는 동양풍 복장을 한 배우들이 노래와 춤, 즉흥 연주로 흥겨운 무대를 펼치는 <한여름밤의 꿈>은 셰익스피어의 동명 희곡을 토대로 하되, 원작에 등장하는 요정 여왕 타이테니아 대신, 도깨비 마나님에게 골탕 먹는 남자 도깨비를 등장시켜 성 역할을 뒤집었다. 또한 사랑의 장난에 휘말린 네 명의 남녀 주인공 이름도 동양의 별자리 28수에서 따온 항(亢), 벽(壁), 루(婁), 익(翼)으로 정하는 등 세밀한 부분에까지 변화를 줬다.

이처럼 연극적 실험을 계속해 온 양정웅은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을 개작한 <서울 착한 여자>를 12월 13일부터 18일까지 서강대 메리홀에서 공연할 예정이다. 세상에서 단 한 명뿐인 착한 여자였던 ‘순이’가 처세술에 능한 사촌 오빠 ‘강 사장’으로 변신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그리면서, 과연 선(善)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나아가 신이란 존재하는가에 관한 고민을 담았다.

“방랑자와 여행자는 ‘한끝’ 차이지만, 영혼은 끊임없이 방랑해야죠. 안주하지 않고 신화와 역사, 인간의 본능과 원초성에 주목한 연극을 추구하고 싶어요. 머무르지 않고, 고이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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