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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사 | 칼럼/인터뷰

마음을 비운 자리에 몸의 음악을 채운다-작곡가 원일

by 야옹서가 2004. 12. 25.

계간 《문화와 나》 2004겨울호| 해외 유명 오페라라면 값비싼 관람료도 개의치 않는 이른바 ‘음악 애호가’들도 정작 국악을 적극적으로 찾아 듣는 경우는 드물다. 하물며 평범한 생활인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소원해진 국악과 대중 사이의 간극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좁혀 가야 할까. ‘국악의 대중화’라는 명제 아래 음악적 실험을 거듭해 온 작곡가 원일을 만나 그 해답을 찾아 보았다.

국악계의 전방위 예술가
원일(37)의 이름은 최근 몇 년간 ‘가장 기대되는 차세대 국악인’을 거론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해 왔다.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듯 그가 밟아 온 음악적 노정은 무척 이채롭다. 그를 언급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상은, 국악 연주에 세계 토속 리듬을 가미해 강한 인상을 남긴 퓨전 타악 그룹 ‘푸리’ 연주자의 모습이다. 하지만 어떤 이는 그를 인디 록 밴드 ‘어어부 밴드’의 초창기 멤버로 기억하고, 또 다른 이는 영화 〈꽃잎〉(1996년), 〈아름다운 시절〉(1999년), 〈이재수의 난〉(2000년)의 음악으로 대종상 영화 음악상을 세 차례나 거머쥔 영화 음악가로 받아들인다. 최근에는 한국적 음악극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 가는 국악 작곡가로 활동 중이니, 어떤 것이 그의 참모습인가 싶다. 1997년 발표한 첫 독집 앨범 제목 《아수라(阿修羅)》처럼, 음악가로서 원일은 삼면육비(三面六臂)를 지닌 존재다.

하지만 끊임없이 대중과 국악 예술 사이의 접점을 찾아 헤맨 그의 시도는, 한국 공연 예술계에서조차 국악이 푸대접 받는 현실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한 절실한 몸부림이었는지 모른다. 전도유망한 국악 연주자에 머물지 않고 작곡가로 선회한 것도 이런 까닭이 아니었을까. 영화 음악을 작곡하며 영상과 음악의 유기적인 관계를 생각하고, 홍대 앞 클럽 문화를 이끌던 인디 밴드 멤버들과 교류하며 원일의 음악적 보폭은 더욱 넓어졌다.

이제 그가 걸어 온 일련의 행보들은 한국적 음악을 시각 이미지로 구현하는 ‘총체적 음악극’ 의 형태로 구체화되고 있다. “연주자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도 연주가 좋아요. 하지만 작곡을 시작한 뒤로는 음악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일에 점점 매료돼요. 특히 음악과 이미지로 소통하는 예술은 언어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국제 무대에서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악가무(樂歌舞)가 하나인 총체 예술로의 회귀
이미 한국 전래 설화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바리-잊혀진 자장가〉(1999년)와 〈우루왕〉(2000년)에서 음악극의 가능성을 시험해 온 원일은, 지난 10월 국립극장 재개관 기념 공연인 창작 창극 〈제비〉에서 또 다른 시도를 펼쳤다. 기존 작업이 한국과 서양의 음악 어법을 절충했다면, 〈제비〉에서는 전통 7음계만으로 작곡하고 서양식 관현악 편성을 탈피해 전통 악기의 담백한 맛을 강조했다. 거문고, 해금, 대금 등 국악기의 음색에 따라 등장 인물의 캐릭터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도 기존 창극과 다른 점이다.

 창극 <제비>의 독특한 음악적 구성도 국악 공연으로서는 이채로운 것이지만, 기실 원일이 꿈꾸는 한국적 음악극의 이상향은 따로 있다. 손재주에만 의지하는 공연이 아닌, 총체적인 ‘몸의 예술’로 회귀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본래 악가무(樂歌舞)가 하나이던 국악이 근대 교육 체제로 편입되면서 여러 분야로 세분화된 현실에서, 이를 본래의 총체 예술로 되돌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대에 서는 모든 이들이 연주뿐만 아니라 노래와 춤까지도 온몸으로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가 200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 제자들로 구성된 음악극 집단 ‘바람곶’을 창단한 것도, 자신이 꿈꾸는 음악극을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다. 원일이 내년 10월 문예회관에서 선보일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 원작의 공연 〈에에자나이카(ええじゃないか)〉의 음악을 작곡하는 동안, 바람곶 단원들은 가무악극, 연극, 음악극 등 다양한 형식의 공연에 참여하며 경험을 쌓고 있다. 이들은 머지않아 세계를 무대로 삼아 바람곶만의 작품을 펼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원일이 앞서 보여 줬던 수많은 음악적 정체성 위에 ‘예술 감독’으로서의 또 다른 얼굴을 추가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음악적 원체험과 몸의 합일
“앞으로 제 공연을 볼 사람들에게 무대와 객석이 하나 되는 체험을 하게 하고 싶어요. 공연이 끝났을 때, 배우들과 함께 연기한 것처럼 격렬한 감정의 기복을 느끼고 몸이 피곤해지는 느낌. 빛이 의식을 일깨우듯이, 소리의 파동으로 의식을 깨우는 ‘빛과 같은 공연’ 말이지요.” 한때는 한국적인 것을 표현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이제 그는 자유롭다.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믿는 순간, 한국의 동시대 정서가 음악 속에자연스럽게 스며 나오리라고 그는 믿는다. 작곡가 원일이 지닌 힘은, 긴 의혹의 시기를 이겨낸 사람에게 존재하는 자기 확신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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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일 1967년 출생. 중요 무형 문화재 제46호 대취타 및 피리 정악을 이수했으며, 추계예술대와 중앙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UCLA 비교 음악학 객원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1993년 창작 타악 그룹 ‘푸리’를 창단해 국악계에 퓨전 바람을 몰고 왔다. 대종상 영화 음악상(1996, 1999, 2000년), 문화관광부 선정 ‘오늘의 젊은 예술인상’(1999년), KBS 국악대상 작곡상(2000년) 등을 수상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글_고경원
사진_김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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