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산책 나온 할머니가 잠시 사라진 동안, 나는 젖소무늬 길고양이의 뒤를 따라갔다. 낯선 사람을 만난 고양이가 대개 그렇듯이, 젖소고양이도 인기척을 느끼고는 얼른 구석진 곳으로 숨는다.
그때 내가 들고 있던 짐들은 15킬로그램쯤 되는 배낭 1개, 20인치 기내용 트렁크 1개, 10킬로그램쯤 나가는 카메라 가방, 그리고 우산. 하여간 그 짐들을 바리바리 메고 끌고 길고양이를 따라갈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오사카 체류 마지막 날이었고, 공항으로 가던 길에 잠시 들른 거라 코인로커에 짐을 맡길 생각도 못한 터였다.
3초쯤 고민하다가, 기내용 트렁크는 길에 세워두고, 귀중품이 든 배낭은 메고, 카메라는 들고 젖소고양이를 따라 뛰었다.
'이거 무슨 극기훈련도 아니고...'하고 잠시 생각했지만, 고양이를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은 어쩔 수 없다.
낙엽 쌓인 길을 가로질러 후다닥 달아나던 젖소고양이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돌 기단 너머로 얼굴을 빼꼼 내민다. 인간이 무섭기는 한데, 그래도 어디만큼 왔는지, 아니면 자리를 떠났는지 궁금하기는 한 것이다. 젖소고양이는 호기심과 두려움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5대5 가르마를 단정하게 탄 얼굴에, 호박색 눈동자가 반짝 빛난다.
여행 도중에 고양이를 만나면, 가끔 원래 일정을 살짝 무시하고 고양이와 잠시 놀게 된다. 예정없이 끼어든 고양이 때문에, 미리 짜놓은 일정이 뒤로 밀려 어그러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그것'을 보러 가는 것이 관광이라면, 내게 여행은 '고양이가 있는 곳을 찾아가는 일'이다. 그 여행의 목적지는 꼭 장소가 아니어도 좋다. 고양이를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 거치는 좁은 골목길도 내게는 더없이 좋은 여행지다.
가까운 곳에 사는 길고양이를 만나러 가는 길은 언제든 생각나면 갈 수 있어서 좋고, 먼 곳에 사는 길고양이를 만나기 위해서 낯선 나라의 공항에 떨어져 가슴 설레며 시작하는 여행은 늘 새로워서 좋다. 심지어 길을 잃고 한 시간 넘게 골목을 헤맬지라도, 고양이를 만나면 내 마음은 보상을 받는다. 혹시 고양이를 못 만나면 어떡하느냐고? 그럼 골목길을 찍으며 놀면 되겠지. 아무리 난감한 상황에 부딪쳐도 고양이만 보면 헤벌쭉 웃고 마는 '대책없는 낙관주의'가, 예측불허한 여행을 때론 즐겁게 만들기도 한다. * 이 포스트는 blogkorea [블코채널 : 길고양이 통신] 에 링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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