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샘터' 웹진 www.isamtoh.com / 2000. 12]   예술의 도시 파리에는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세느강을 가운데 두고 세계적인 미술관 두 개가 마주 서 있습니다. 하나는 그 유명한 루브르 미술관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오르세 미술관입니다. 루브르 미술관은 르네상스와 고전주의ㆍ로코코 양식 건축물로서 고대 유물부터 18세기까지의 미술 작품을 소장ㆍ전시하고 있고, 오르세 미술관은 19세기 말에 지어진 건축물로서 소장 예술품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대표하는 작품들입니다. 두 미술관의 소장품과 건물 자체가 당대를 대표하는 예술품인 셈이어서 두 미술관의 의미와 가치는 더욱 커 보입니다.

특히 오르세미술관은 근대미술과 현대미술을 잇는 사실주의, 상징주의, 그리고 인상주의 작품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어 '19세기 미술관'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립니다. 2001년 2월 27일까지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오르세 미술관 한국전-인상파와 근대 미술’ 전에서는 회화 35점, 드로잉 13점, 사진 21점 및 미술관 모형 1점 등 오르세미술관 소장품 70점을 국내 최초로 소개했습니다.

오르세 미술관(Musee d'Orsay)은 원래 기차역과 호텔의 용도로 지어진 건물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멀티플렉스 건물이라고나 할까요. 이 건물은 1878년 파리국립미술학교 건축학 교수 빅토르 랄루(Victor Laloux)가 설계해,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맞춰 개장했습니다. 1939년에 폐쇄됐으나, 1986년 건축가 가에 아울렌티(Gae Aulenti)에 의해 현재의 미술관 형태로 변신하였습니다. 19세기의 건축물을 원형과 거의 흡사한 수준으로 복원해 당시 건축 양식에 대한 생생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옛 건물들이 효율성 추구라는 명목 아래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이지요.

제1전시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르누아르의 ‘피아노 치는 소녀들’이군요. 인상주의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빛과 색채의 관계인데요, 그런 의미에서 ‘빛으로 그린 사람’이란 표현이 무색하지 않을 르누아르의 그림으로 전시를 여는 것은 적절한 선택인 듯 합니다.

르누아르의 그림 뒤로는 작가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있습니다. 정면을 보고 있는 사진도 몇 있지만, 대부분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시선을 왼편 45도 각도로 올려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어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 중에는 저명한 사진가 펠릭스 나다르(Felix Nadar, 1820~1910)가 촬영한 작품도 있어, 그의 솜씨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뒤로 에드가 드가의 ‘발레 연습’이나 클로드 모네의 ‘생-라자르 기차역’, 에두아르 마네의 '로슈포르의 탈출'과 같은, 인지도가 비교적 높은 작가의 작품들과 알프레드 시슬레의 ‘루브시엔 설경’, 까미유 코로의 ‘물가의 버드나무’, 그리고 귀스타브 쿠르베의 사실주의적 작품 '샘' 등이 눈에 띕니다.

아,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받았음직한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cois Millet, 1814~1875)의 ‘이삭줍기’를 빼놓을 수 없지요. 소형 복제 그림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았던 부분을 자세히 보면서 예전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예전엔 그냥 농촌의 정경을 그린 차분한 그림으로 생각했는데, 큰 그림으로 보니 지평선 근처에 보이는 풍성한 수확을 거둔 사람들의 무리와, 추수가 끝난 뒤의 황량한 들판에서 떨어진 이삭을 주워 생계를 유지하는 세 아낙의 모습이 뚜렷한 대조를 이루더군요. 비록 전면에 배치된 세 아낙의 형상이 화면의 거의 전체를 차지하고는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풍요로운 사람들의 모습과 대조되면서 그들의 쓸쓸함이랄까, 삶의 고단함이 더욱 확장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2전시실에 전시된 그림들은 전체적으로 크기가 작습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폴 세잔느의 그림들은 “자연은 원통, 원뿔, 원추로 되어있다.”라고 표현한 그의 말처럼 작은 색면을 쌓아올리면서 입체적인 형태를 표현하는 견고한 면 처리라든가, ‘바구니가 있는 정물’에서 보이는 다중시점 화법이 눈길을 끕니다.

그밖에 빈센트 반 고흐의 ‘생 레미의 생 폴 정신병원’, 조르쥬 쇠라의 ‘푸른 옷의 농촌 아이’, 툴루즈 로트렉의 ‘사창가의 여인’ 등 익숙한 작가들의 작품이 눈에 띄지만 그들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작품은 전시되지 않았고 그나마 한 점씩 뿐이라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또 전시장 거의 끝 부분의 파리 만국박람회 때의 사진들은 100년 전의 파리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자료였지만, 전반적으로 사진의 크기가 작아서 보기에는 좀 힘들었구요.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미술사 책을 읽거나 작가의 전기를 읽으면서 그림의 맥락을 읽는 눈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림에 대한 앎이 피상적인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원작을 직접 보면서 느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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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포털 엔키노/2000. 10]
느낀대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효과적인 자기관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른스럽다’는 평가를 받는 사회에서는, 감정을 그대로 노출하다가는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이거나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으로 취급받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래의 감정'이란 통제하기 어려운 녀석과 손잡고 다니기보다는, 의례적인 웃음을 얼굴에 띄우는 길을 선택합니다.

‘내가 기쁠 때 같이 기뻐해 주고, 슬플 때 같이 슬퍼해 줄 사람’을 마음 속으로 찾는 이들이 많은 것도 이런 감정관리에 지친 탓이겠지요. 그러나 현실에서 타인과 그런 관계를 맺기란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가족이 아니라면, 사랑의 달콤한 환상 속에서 빠져 있는 연인 사이에서나 가능한 일일까요.

그렇지만 당신의 통제하기 버거운 감정을 아무 조건 없이 받아주는 공간이 있다면 어떨까요? 지금 소개하는 김범의 `유틸리티 폴더`가 그렇습니다. 이 전시를 보려면 `유틸리티 폴더`웹사이트에서 폴더 아이콘을 클릭하기만 하면 됩니다. `유틸리티 폴더`전은 대관전시가 아닌 인터넷 전시니까요.

접속환경만 갖춰져 있다면, 장소와 시간의 제약 없이 다수의 사람들이 동일한 조건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가능한 인터넷 전시는 예전부터 대안적인 전시문화로 제안돼 왔지만, 대관전시가 주류를 이루는 미술계의 특성상 오프라인 전시의 리뷰 성격을 띠거나 개인홈페이지 내의 갤러리 같은 부속개념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요. 또 원본이 이미지 파일로 전환되면서 원래 질감의 입체적인 감상이 불가능하게 된다는 한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김범 작업은 다릅니다. 전시된 작품의 감상과 향유는 프린터에서 출력물을 뽑아 벽에 붙이거나, 지시를 따르기만 하면 완성되는 아주 간단한 절차를 거칩니다. 모든 작품이 단순한 2D 그래픽과 텍스트로 이뤄졌기 때문에, 원본과 사본의 차이 없이 온전한 전시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단, 관람객이 직접 작품제작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한 폴더 속의 지시내용은 좀 엉뚱해서,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에 길들여진 사람이라면 어이없어 할 지도 모릅니다.

유틸리티 폴더를 클릭하고 들어가면 여섯 개의 아이콘이 뜹니다.
간단히 설명을 드리자면, 첫 번째 항목 ‘유틸리티에 대하여’와 마지막의 ‘Site Memo’는 안내문 성격을 띠고 있고, 본 전시 내용은 ‘비정’, ‘대리인’, ‘탈 것’, ‘CowardJar’입니다. 그중에서 우선 ‘대리인’폴더를 클릭해서 안내문을 읽어보죠. 전 두 명의 대리인 중 LovelyWeeper를 선택했습니다.

아이콘 속 지시사항은 이렇군요.
1. 프린터를 이용하여 LovelyWeeper.img 파일의 이미지를 인쇄합니다.
2. 이미지의 귀 부분에 희게 표시된 점들을 연필, 볼펜, 못 따위로 뚫습니다.
3. 인쇄된 이미지를 어딘가 구석에 붙여두고, 보고 들은 슬픈 일들에 대해
사용자가 직접 울 수 없을 때마다, 그 일들에 대해 들려주어 대신 울고 있도록 합니다.


그림에 구멍을 뚫는 행위는 감상자의 풀리지 않은 슬픔에 숨구멍을 내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롤랑 바르트가 언급한 푼크툼과 맥락을 같이하는 작은 구멍들은 1차적으로는 관람자의 마음을 날카롭게 관통했던 상처의 재현이지만, 이와 같은 주술적인 재현을 거치면서 억압된 감정을 자유롭게 하는 상징적인 배출구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죠. 일종의 내적 치유의 성격도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소개해드린 LovelyWeeper 외에도 많은 친구들이 당신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시를 보고 나면 “이게 뭐야?”-.-;하고 투덜거릴 분들도 계시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거대담론을 주제로 삼는 전시보다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김범씨의 화법은 표면적으로는 단순하지만 의미는 복합적이어서, 아마 제가 느낀 것과 작가의 의도는 좀 다를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람은 자신에게 가장 절실한 것에 반응한다고 하니까요. 유틸리티 폴더를 열었을 때, 여러분에게 가장 유용한 것은 무엇일지 궁금해집니다.

* 지금은 온라인전시가 끝나 웹사이트가 닫혔답니다. 아쉽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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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포털 엔키노/2000. 10] SF영화들을 보면, 긴박한 상황에서 종종 등장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우주선에서 공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혹은 에일리언이 쫓아오지 못하도록, 혹은 방사능 오염으로부터 내부를 보호할 수 있도록 긴 통로 한쪽 끝부터 순차적으로 닫히는 문. 내가 통과한 뒤 문이 닫히면 스릴 만점이겠지만, 바로 눈앞에서 그 문이 퉁 떨어져 내릴 때의 암담함이란...윽∼상상하기도 싫습니다. 

제 눈에 비친 김영삼의 작업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퉁, 퉁, 떨어져 내리는 문의 이미지로 남았습니다. SF영화의 한 장면을 인용하면서 글을 시작한 터라 비디오작업을 연상하실 지도 모르지만, 그의 작업은 이른바 일반인들에겐 `비인기 종목`인 추상회화입니다. 장황한 이론적 배경을 늘어놓으며 현학적인 게임을 즐기는 작가도 있습니다만, 그는 라깡이나 보드리야르를 들먹이며 썰을 풀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가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는 자비로 대관료를 치러 일주일 동안 전시를 하고, 전시가 끝나는 화요일이면 빡빡한 일상으로 돌아가 작업과 생계유지를 병행해야 하는, 이른바 무명작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이 제 기억에 남았던 것은, 그 절박한 순간의 감정이 그림 속에서 선명하게 전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시장 벽에 걸린 그림들은 흐릿한 얼룩 위에 교차되는 불규칙한 가로선 혹은 세로선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십자형이 여러 개 중복된 것처럼 보이는형태들은 작가가 1997년도부터 창살을 그리다가 우연히 가로선을 긋게 되면서 나온 것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창살의 이미지에, 옆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장애물의 이미지가 합쳐지면서 시각적인 압박감은 더욱 커집니다. 버거운 과제를 해치우듯 삶을 살아내는 작가 앞에 펼쳐지는 사건들이 일종의 거대한 쇠창살처럼 표현되는 것이지요. `삶은 장애물 경기와 같다`는 작가의 생각이 이렇게 중첩되는 검은 선으로 나타납니다. 또 검은색의 선 뒤에서 대립을 이루는 적색과 녹색의 색면 처리는 강한 대비를 이루며 내면의 갈등구조를 드러냅니다.

전시장이 회화작품으로 채워져 있는 반면, 바닥 한쪽에는 흰색 부직포 조각들이 잔뜩 쌓여있는 것이 보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십자형태를 일일이 손바느질해서 만든 것으로, 마치 허물을 벗은 듯한 모습이 인상깊었습니다.

작가는 원래 솜을 채워 넣어 통통한 형태로 전시하기로 계획했었지만, 수많은 십자 형태를 만들어내는 동안 지금 상태대로 전시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그 모습이 마치 병원침대에서 끄집어낸 시트 같기도 하고, 평면회화에서 보이는 창살 이미지가 표백되어 그림 밖으로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자신의 삶이 그렇게 힘든 것은 아니었다고 작가는 말합니다. 눈앞을 막아서는 건 외부의 무언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는 깨달음을 창작과정에서 얻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의연함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죠. 자신을 공격하는 힘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힘이 어떤 모습을 하고 쳐들어올지 마음졸이며 기다릴 뿐이지만, 그 실체를 파악한 사람은 적어도 무엇과 싸워야 할 것인지는 결정할 수 있습니다. 삶에 있어서 자신이 결정권을 갖는다는 것은 한편으론 힘겹지만, 한편으론 뿌듯한 일이지요. 그 소중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작업을 계속할 수 있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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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포털 엔키노/2000. 10] 볼일이 있어서 인사동 쪽으로 나갔다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깜짝 놀랐습니다. 예전에 낡아빠진 육교가 서 있던 자리에, 빨간 카펫이며 황토색 바탕에 검은 얼룩무늬가 있는 천을 둘러쓴 녀석이 떡 버티고 서 있었으니 말이죠.

무늬 때문인지, 마치 거대한 호랑이 한 마리가 다리를 쩍 벌리고 네거리에 우뚝 서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처음엔 인사동도 ASEM회의 때문에 이렇게 변신한 건가? 하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설치미술가 홍현숙씨의 작품이더군요. (ASEM이랑은 아무 관계도 없었습니당.^^;)

형식면에서 보았을 때에는 거대한 천과 끈을 사용해서 공공건물이나 특정 지역을 말 그대로 포장해버리는 크리스토의 작업도 연상됐습니다만, 크리스토의 작업이 심플한 선물 같은 느낌이라면, 홍현숙의 작업에서는 동물적인 생동감이 느껴집니다. 호랑이 가죽무늬 천의 부드러운 촉감과 현란한 무늬 , 계단에 깔린 붉은 카펫에서 어렴풋이 그런 인상을 받을 수 있고, 작가노트를 읽어보면 그 느낌은 더욱 명확해지지요.

“…낡은 육교는 아름다웠다. 생로병사의 아름다움까지도 거기 있었다. 패인 시멘트와 녹슨 철근에서 마치 관절염 걸린 비명이 들리는 듯!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무게를 견뎌냈을까? 녹신녹신해진 계단과 난간과 기둥의 선. 그 선은 이미 직선이 아니다. 시간은 육교의 강한 직선을 부드러운 곡선으로 만들고 그 거대한 덩어리를 서서히 허물어 내리고 이내 먼지로 만들 것이다.

우리가 그 육교에 피부를 만들어 준다. 가장 동물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는 호랑이의 가죽을 빌려온다. 그래서 육교의 가쁜 호흡을 들려주고 싶다. 육교의 숨결에 귀기울이게 하고 싶은 거다.
환경과 생태에 대한 담론은 무성하다. 그러나 그 실천의 작은 걸음은 어쩐지 미루고만 있는 우리들. 돌아보라! 존재의 생생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의외로 많다.”

작가는 우리 주변에서 이미 존재를 감춰버린 호랑이를 서울 한복판에 되살려 환경문제에 접근한 듯 합니다. 아∼주제가 거대하기는 하지만, 일단 그 방식이 고답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한 가지 더 욕심을 부린다면, ‘통과한다’는 행위에 대한 비중이 좀 더 강했다면, 하는 거였습니다.

처음 이 전시의 계획서를 읽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이 어떤 터널의 형태였는데, 막상 전시를 보니 그냥 육교를 감싸는 식이더군요. 비닐하우스처럼 둥근 지붕을 올리고 천을 씌운 뒤에 그 속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었다면,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 뭔가 독특한 이벤트가 펼쳐졌더라면 작가와 관람자가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좀 더 커졌을 텐데……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작가의 의도와는 별 관계없지만, ‘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본 계기가 되기도 했어요. 나는 지금 공중에 난 길을 걷고 있다, 뭐 그런 느낌. ^-^

평소에는 그 존재를 느끼지 못하다가, 어떤 계기를 통해 “아, 이런 게 있었구나” 하고 불현듯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경이로운 체험’이라고나 할까요. 공공장소에서 진행된 설치미술 인사동 육교 설치 프로젝트는 이런 발견의 즐거움을 제공합니다.

아쉽게도 이번 작업은 10월 31일까지만 전시되지만, 작업이 오랫동안 방치돼 훼손되거나 처음의 산뜻한 충격이 희미해지는 것보다는, 게릴라식으로 단기간 설치했다가 여운을 남기면서 사라지는 것도 멋있을 거란 생각을 해 봅니다.

* 호랑이로 변신했던 인사동의 낡은 육교는 이제 찾아가도 만날 수 없습니다.
육교가 헐리고 큰 횡단보도로 바뀐지 오래되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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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포털 엔키노/2000. 9] 세상에 태어날 준비를 한지 6개월, 탄생을 알리는 울음소리 한번 내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둔 그대에게 애도를 표합니다. 그대의 어머니-페미니스트 그룹 `입김`이 그렇게도 허무하게 그대의 생명을 포기할 거였다면, 차라리 ○○화랑이나 △△아트센터처럼 그럴듯한 장소에서 제왕절개를 선택하는 편이 나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긴, 그대의 이름을 `아방궁 종묘점거 프로젝트`라 지었을 때부터 난산은 예견된 것이었지요. 5백년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후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는 종묘를 점거해서 여성의 자궁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는 계획을 듣고, 성균관 유림 할아버지들이나 이씨 종친회에서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그대의 죽음을 전해듣고, 전시 내용이 어떠했기에 점잖은 분들이 `더러운 자궁` 운운하며 격분했는지 되짚어 보았습니다. 남녀의 생식기를 닮은 설탕과자를 모양대로 따먹는 행위를 통해 성적 속어에 담긴 언어폭력을 풍자하는 `뽑기 따먹기`, 금기의 말이 적힌 풍선을 터뜨리며 해방감을 느끼도록 한 `∼마라(should not)` 길 걷기, 명화 속 여성의 나체에 남성 저명인사의 얼굴사진을 합성하여 남성 위주의 관음적 시선을 조롱하는 `명화극장`, 권위의 상징인 각종 제복을 해체하며 가장무도회를 여는 `종로에 딴스홀을 허하라`, 여성의 자궁을 형상화한 작품을 통과하면서 상징적인 재생을 체험하는 `탄생체험 놀이` 등, 관람자의 참여를 전제로 하는 작업이 대부분이더군요.

이번 작업은 축제라는 형식을 통해 거부감을 줄이고 카타르시스를 유발한다고는 하나 계몽적인 인상이 강했습니다. 원래 미술판 안에서의 놀이란 현학적일 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비록 모든 전시내용이 관람자의 참여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이 놀이 속의 계몽대상이 바로 나다` 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 즐겁게 그 놀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요. 게다가 이 프로젝트가 전복대상으로 삼은 가부장제를 삶의 기반으로 선택한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럴테구요.

어쨌거나 결과만을 놓고 봤을 때, 작품 훼손과 성적인 폭언으로 그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이 있고, 상징성을 내포한 예술행위가 천박한 해프닝으로 평가절하되는 현실은, 그대 죽음의 무게만큼 제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하지만 이미 유사한 경험을 여러 번 치러 본 그대의 어머니라면 이런 결과를 충분히 예상했을 텐데, 그럼 이번 프로젝트의 목적은 전시파행 자체의 이슈화였을까요? 그렇다면 그대의 희생은 `페미니즘 미술의 순교`가 되는 건가요?

단순히 이번 전시의 파행을 예상하지 못한 경우라면, 그대의 어머니는 지나친 이상주의에 젖어있었던 거겠지요. 전시공간을 달리하고, 흥미를 끄는 화법을 도입하고, 참여계층을 폭넓게 잡는 것만으로는 일회적인 이벤트가 될 뿐입니다.

기왕에 종묘점거를 선언하고 나섰다면, 단순히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대중을 계몽하겠다고 떨쳐 일어선 몇 명의 전사`들에 의해 주도되는 행사가 아닌, 그대의 어머니가 만들고자하는 세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으는 자리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지지를 이번 자리에 이끌어내기까지는, 6개월 남짓한 출산준비 기간은 너무 짧았던 게 아닐까요.

아마도 그룹 `입김`은 이번 프로젝트에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선정하기보다, 가부장제 아래서 실질적인 고통을 받아온 사람들-물론 그 범주 안에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포함됩니다-을 일차적인 대상으로 잡아야 했을 겁니다. 예술작품이 관람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큰 원동력은 계몽이 아닌 공감 속에 있으니까요. 이분법적인 투쟁론만 내세우기보다는, 좀 더 전략적인 방법으로 접근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그대의 죽음이 이번 사건의 끝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서 이번 행사와 관련해 다양한 색깔의 목소리가 울려나오고 있는 걸 보면 말이죠. 생산적인 논의를 통해 다음에는 보다 당찬 모습의 그대가 태어날 수 있기를, 다시는 이와 같은 희생이 재연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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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포털 엔키노/2000. 10 .30] 시청 쪽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하철 통로 벽에서 이상한 물체들을 발견했습니다. 붉은 벽돌 틈새에 끼어있는 투명한 아크릴 큐브들-호기심에 눈으로 하나하나 훑어보니 한 두개가 아닙니다. 큐브 안에 들어있는 새끼손가락보다도 작은 크기의 인형들이며, 기괴한 방식으로 몸체가 짜깁기된 곤충들-아, 작가는 함진이군요. 1978년생이니 나이와 경력을 중시하는 미술판의 기준으로 본다면 아직 약병아리도 못되고, 이제 막 부화하려는 달걀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독특한 작업세계 때문에 주목받는 신진작가 중 한 사람입니다.

함진의 작업은 일단 크기 면에서 관람자의 허를 찌릅니다. 초등학교 앞에 많이 있는 100원짜리 뽑기 기계 아시죠? 원형캡슐 안에 장난감로봇이며 반지 따위가 들어있는......딱 그 정도 크기의 작업을 합니다. 고물고물한 그의 인형작업을 보는 사람들의 첫 반응은 "야∼진짜 귀엽다. 어쩌면 이렇게 조그맣게 잘 만들었지?"지만, 그 다음 반응은 "어, 근데 얘네들 좀 엽기적이다..."입니다.

전시된 인형들을 한번 쭉 훑어보죠. 파리와 바퀴벌레를 자가용처럼 타고 다니는 나체의 아저씨들이나 머리카락으로 만든 집 속에서 쉬고 있는 손톱만한 종이인형은 그래도 애교스러운 축에 속합니다. 멸치 머리와 사람 몸통이 결합되면서 담배를 물고 있는 회사원이나 금발의 신부가 탄생하기도 하고,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곤충들의 사체를 이어붙여 만든 익룡은 앙증맞지만 한편으론 섬뜩합니다.


이번 전시 중에서 가장 엽기적인 상상력을 보여주는 그의 작품은, 순수하고 귀여운 이미지로만 인식돼온 만화캐릭터들의 재해석입니다. 두개골의 절반이 날아가 뇌와 안구가 노출된 미키마우스 인형이라던가 스트립 쇼를 하는 키티 인형, 게이인 곰돌이 푸가 애널섹스를 하는 모습이나 채찍을 들고 새도매저키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모습-이렇게 작품 전반이 성적 욕구와 파괴욕구라는, 대극적이며 원초적인 심상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인형들의 조그마한 몸 속에 구깃구깃 억눌려 있다 튀어나오는 비대한 욕망은 관람자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보통 만화 속 세계에선 천진난만하고 행복한 녀석들이 주인공인데, 함진의 인형은 이른바 `아픈 것`, `나쁜 것`, `아닌 것` 들을 다 담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디에나 고통이나 욕망은 존재하며, 그런 면들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이 만화보다 더 비현실적이라는 메시지가 느껴집니다.

함진 스스로 설명하는 제작 동기는 간단합니다. 집에 혼자 남아 이것저것 주물럭거리며 뭔가를 만들었던 자신의 자폐적인 성장기가 작업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죠. 벽의 구멍난 틈이나 방의 모서리 같은 구석진 곳을 찾아다니며 전시하는 방식이나, 그의 인형들처럼 작아지고자 하는 욕구는 상징적인 퇴행을 반영합니다. 그렇게 작아져서 어머니의 자궁 속과 같이 어둡고 따뜻한 방, 고통없는 안전한 세계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지요.


그러나 자폐적인 세계는 외부와의 관계를 부정해버리기 때문에, 그 안에 영원히 머무르는 것은 결국 자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파국을 막기 위해 함진이 선택한 것은 자신 안에 있는 다양한 욕망들을 인형이라는 형태로 끄집어내며 외부와 소통하는 방법입니다.

자신을 보호하던 껍질을 힘겹게 부수고 나오는 병아리의 모습은 핏물에 흠뻑 젖어있어 끔찍하기까지 하지요. 창작활동을 통해 자폐적인 세계의 껍질을 막 깨고 나오는 함진의 작업을 보면서 그 병아리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의 걸음은 아직 불안정하고 미래도 불투명하지만, 불확실함을 인정하는 건 곧 삶의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니까요. 그가 자기만의 세계를 나와 다른 세계와 접촉하기 시작할 때, 그의 인형들은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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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포털 엔키노/2000. 9]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유형이 가지각색인 것처럼, 사람의 모습을 본뜬 인형에도 여러 부류가 있습니다. 아마도 인형 안에 어떤 생각을 담으려고 했는지에 따라 그 인상이 달라지지 않나 생각됩니다만......완구점에서 흔히 보는 바비인형류는 `쭉쭉빵빵해야 진짜 여자`라는 메시지가 노골적으로 담겨있어 짜증스럽지만, 살다보면 때로는 가슴 설레게 하는 인형들도 만나게 됩니다.

제 경우에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 등장하는 죽음과 재생의 이미지가 담긴 인형극 장면이라던가, 인형 애니메이션인 <버림받은 자들의 밀실> 속의 마네킹 가족을 볼 때가 그런 때였지요. 처음 일본인형 전시회에 대한 안내메일을 받고 나서 꼭 가보리라 마음먹은 건, 제가 좋아하게 될지도 모를 또 하나의 인형을 만나러 간다는 기대감 때문이었습니다.

전시장소인 주한 일본대사관 2층에 들어서면, 빨간 천을 씌운 나지막한 탁자 위의 인형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70점에 달하는 인형들을 모두 보여드릴 수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일본사회 속에서의 인형은 단순한 장식품이나 완구를 넘어,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일본에서는 등신대의 인형을 조종하면서 연기하는 인형극인 `분라쿠(文樂)`가 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인형의 테마를 정할 때 `가부키(かぶき)`나 `노(のう)` 등의 이야기구조를 빌려오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건 어린이들을 위해 인형을 장식하는 풍습인데,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의 명절이 다릅니다. 먼저 3월 3일의 `히나마쯔리(ひなまつり)`를 볼까요? `모모노셋쿠`(もものせっく:복숭아 명절)이라고도 하는 이 날에는 여자아이의 건강과 장래의 행복을 비는 히나 인형을 전시합니다. 3월 3일이 지나서도 히나 인형들을 치우지 않으면 아이가 시집을 늦게 간다는 전설(?)도 전해지는군요. 히나 인형의 단은 1단부터 많게는 7단까지도 올릴 수 있지만, 이번에 전시된 것은 가장 기본이 되는 1단 부분으로, 금박병풍을 치고 일본 왕과 왕비를 앉힌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히나마쯔리가 여자아이들을 위한 인형명절이라면, 5월 5일 단오절(たんごのせっく)에는 남자아이가 무사처럼 강한 사람으로 성장하길 기원하는 `5월 인형`을 장식합니다. 요즘은 5월 5일이 남녀공통의 어린이날인 탓에 이런 구별은 옛날보다는 좀 덜하지만요. 이 인형은 갑옷과 투구를 쓰고 완전무장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흠......일본영화 <카게무샤>에 나오는 아저씨들의 전투복장과 비슷하지요?


이렇게 정교하고 화려한 장식미를 자랑하는 일본인형이지만, 무척 단순한 모양의 `코케시(こけし) 인형`도 있습니다. 과거 일본의 빈곤층에서 노동력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여자아이들은 군식구로 여겨져 버림받거나, 방직공장 또는 사창가로 보내지곤 했는데, 이런 여자아이에 대한 기억의 증표로 만들어 간직한 것이 코케시 인형입니다. 전통 코케시 인형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기묘한 느낌을 받게 되는 건, 그런 슬픈 역사가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인 듯 합니다.


* 일본인형의 세계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분들께 드리는 팁 한 가지!
살아 움직이는 일본인형을 보고 싶다면, 카와모토 키하치로의 인형 애니메이션 <부조리 3부작>을 권합니다. 일본 전통극예술의 모티브를 인형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한 것인데, 무척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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