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나/ 2008년 겨울호]

 

수도승처럼 파르라니 깎은 머리, 죄수복 같기도 하고 어릿광대의 무대복 같기도 한 줄무늬 셔츠를 걸친 사내들이 어두운 작업실에 줄지어 섰다. 조각가 천성명은 자신의 페르소나인 그들을 몽환적인 잔혹극 속으로 불러낸다. 누군가는 천성명의 연극적인 조각에서 상처를 읽어내고, 누군가는 어두운 내면의 투쟁을 본다. 그러나 두려워 눈을 가리고 달아나면서도 기어이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그의 작품 속에 있다.

천성명은 경기 화성시 동탄면 목리창작촌의 컨테이너 작업실에서 하루에 12시간씩 창작에 전념한다. 정오께 작업실로 왔다가, 자정이 다 되어서야 수원 집으로 향하는 것이 그의 하루 일과다. 2001년 무렵, 동료 작가들과 함께 맨땅에 터를 닦아 목리창작촌을 만들었고, 그의 주요 작품 대부분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내년이면 이 작업실도 철수해야 한다. 시설이 낙후되고 공간도 부족한 데다, 동탄 신도시 개발의 여파가 이곳까지 미친 까닭이다. 녹슨 컨테이너 지붕에는 2007년 개인전 때 전시했던 거인상이 올려져 있다. 워낙 덩치가 큰 작품이라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아, 어쩔 수 없이 지붕 위에 뒀다고 한다.


이렇게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그가 만든 자소상들은 대개 1미터 내외의 높이다. 등신대보다는 조금 작고, 인형보다는 조금 큰 크기다. 인간과 인형의 경계선에 있는 대상을 표현하기 위해 찾아낸 적정 높이가 1미터인 셈이다. 물론 모든 작품을 처음부터 이런 크기로 제작한 것은 아니다.


“원래는 등신대였는데, 점점 머리 부분만 가면을 쓴 것처럼 커졌어요. 그러다가 머리는 그대로고 몸만 작아진 형태로 바뀌었어요. 현실 공간에 놓았을 때 아이처럼 보이지만, 얼굴은 어른의 모습으로 보이죠.”


천성명은 예술품의 권위를 상징하는 좌대를 버리고 맨바닥에 조각을 세운다. 좌대의 도움 없이 두 발로 직립한 조각들이 전시장에 들어설 때, 공간에 긴장감이 감돌고 맨바닥은 어느새 연극적인 무대로 변신한다.


경계에 갇히다

천성명의 페르소나들은 이곳과 저곳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경계선 위를 맴도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끝날 줄 모르는 갈등 상황을 벗어나려 애쓰지만, 이동수단으로 선택한 탈것들은 하나같이 무용지물이다. 앞뒤로 흔들리는 요람, 빙글빙글 맴도는 회전목마, 발을 굴러야만 겨우 움직이는 장난감 말…. 잃어버린 유년기를 상징하는 이 물건들은 모두 멈춰 있거나,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원래 있던 곳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한다. 구원을 위한 날개조차 무용지물이 되거나, 흉기로 돌변한다.


갤러리 상에서 열린 다섯 번째 개인전 《달빛 아래 서성이다》(2005)에서, 달을 향해 날아오르던 남자가 결국 좌절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두운 하늘 한가운데 뚫린 구멍처럼 빛나는 달은 상징적인 탈출구로 기능하지만, 남자는 달을 향해 날아오르다 몸을 짓누르는 날개의 무게 때문에 추락하고 만다. 언뜻 보기엔 환상동화의 한 장면을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인형들은 좌절과 상처로 얼룩져 있다.


천성명의 작품을 본 사람들은 묻는다. 당신의 어두움은 어디까지냐고. 그는 답한다. 20대, 30대에 학교를 갓 졸업해 대한민국에서 작가로 살기를 선택한 사람들에겐, 밝은 일보다 어두운 일들이 더 많지 않겠느냐고, 그래서 내겐 어두운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고. 그런데도, 그 어둠 속에서 치유의 빛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신비한 일이다. 천성명이 만든 자소상은 그가 유독 애착을 갖는 검은 거울의 상징성과 닮았다. 은빛 거울이 빛의 세계에 속한다면, 검은 거울은 의식 깊은 곳에 가라앉은 어둠의 세계를 비춘다. 전시를 보러온 사람들은 내면의 그림자를 보여주는 검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조심스레 마음을 열었다.


상처를 치유하는 조각들

“처음에는 저도 그런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하는 과정에서 작업하는 자체가 저에게 일종의 치유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인식을 갖기 시작한 게 2005년 무렵이었어요. 흥미로운 건 제가 제 얼굴을 빚은 작품으로 제 얘기를 하듯, 타인들도 제 작품을 통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전시회 소식을 신문에서 보고 기사를 오려내 전시장까지 찾아와서는, 작품을 보니 억눌린 자기 인생을 보는 것 같다면서 저를 붙잡고 감정을 토해내는 아주머니도 계셨어요.”


여섯 번째 개인전부터는 이전 작품보다 한층 더 직설적인 세계로 접어들었다. 이전 전시에서 자기검열을 거쳤던 장면들도 스스럼없이 묘사했다. 손목을 그은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조차 푸른 눈물로 처리했던 전작과 달리, 최근 작품에서는 아물지 않은 상처에서 스며 나온 피비린내가 물씬 풍긴다.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서정적인 동화 같은 면을 지녔던 그의 전작에 열광한 사람들 중 일부는, 갑자기 격하게 상처를 토해내는 천성명의 조각에 낯설어했다. 하지만 그런 변화의 배경에는 ‘나를 찾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다.


“제가 원래 모델링 작업을 잘 안 해요. 자소상을 만들어오긴 했어도, 동양화로 치면 실경산수보다 관념산수에 가까웠죠. 그러다 ‘그림자를 삼키다’ 작업을 하면서 오래간만에 작은 거울을 사서 계속 보면서 제 얼굴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얼굴이 매일 달라지는 거예요. 그때마다 고치기를 한 달 동안 매일같이 했어요. 전날 술을 마셨거나 약을 먹고 자서 얼굴이 부으면 또 다르게 보여서, 고치고 또 고치고. 결국 나중엔 거울에 비친 내 형상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나’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나는 이렇게 생겼어’ 하고 아는 것과, 남들이 아는 나는 굉장히 다르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 이야기가 구체화된 것이 ‘그림자를 삼키다’의 1부 얘기죠.”


내 안의 그림자를 만나는 여정

갤러리 선컨템포러리에서 열린 여섯 번째 개인전 《그림자를 삼키다》 1부(2007)에서는 천성명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전작에서 그가 우회적으로 상처를 이야기했다면, 이제 천성명의 페르소나들은 피로 물든 사이코드라마를 연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변화 속에서도 상처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과, 절대 상처를 내보이며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는 두려움은 거세게 충돌한다. 한 몸에서 갈라져 나온 상반된 욕망은 인질극을 벌이는 샴쌍둥이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두 욕망의 근원은 하나이니, 서로를 찌르고 베는 일은 결국 스스로를 공격하는 것일 뿐이다. 눈을 잃고 껍데기만 남은 거인, 물고기 가면을 뒤집어쓴 소년, 풍경을 손에 든 소녀 등 그의 전시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자아를 반영하며, 서로의 관계가 유기적으로 맞물리도록 치밀하게 계획되어 전시된다.


몸은 여럿이나 실체는 하나인 자소상들이 피를 흘리며 상처를 드러낸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 이들은 작가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실체인 동시에, 그의 삶을 지배하는 그림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음속의 그림자를 직시해야만, 비로소 그림자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질 힘이 생겨난다. 그런 뜻에서 줄무늬 셔츠의 아이가 뒤집어쓴 물고기 가면은 의미심장하다. 이 가면에는 눈을 부릅뜬 채 수도에 정진하기를 독려하는 사찰의 목어처럼, 내면의 각성을 향한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초기에는 모터를 달아 장난감처럼 단순동작을 반복하는 기계인형을 만들거나 음향 효과를 덧붙이면서 순간적인 한 장면을 연출하는데 집착했어요. 하지만 이젠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내적인 움직임을 이끌어내려 해요. 초기 작업이 한 장면의 연출이었다면, 이젠 장면과 장면을 이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단계인 거죠.”


이야기로 소통하고 싶은 욕망

오는 10월 헤이리 터치아트 갤러리에서 열릴 일곱 번째 개인전 《그림자를 삼키다》 2부 전시에서는, 그가 보여주고픈 이야기의 윤곽이 좀 더 뚜렷해질 듯하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받는 상처에 대한 얘기가 1부의 주된 내용이었다면, 2부는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욕망, 그로인해 입은 상처까지도 받아들이고 해소하는 내용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특히 이번에는 학습화된 인간을 상징하는 아홉 명의 늑대 인간 캐릭터가 새롭게 등장해 이야기를 매듭짓게 된다. 전시가 끝나면 다시 보기 힘든 설치작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사진 작업과 미니어처 작업, 전시 내용을 담은 단행본도 함께 구상 중이다.


천성명은 자신의 상태가 ‘흰색과 검은색의 중간에 두 발을 한 쪽씩 걸치고 선 느낌’ 같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규정짓는 경계뿐 아니라 미술계의 시스템에도 관심이 많다. 이는 작업실에 틀어박혀 작품만 하는 게 아니라, 전시 외의 다른 방법으로 대중과 소통을 시도해온 그의 행보와 이어진다. 천성명은 한때 자신의 이름을 건 아트숍 ‘천성명인(人)’을 열었다. 일회적 전시로 끝나는 공간이 아니라 작품도 보고, 저렴한 가격에 작품을 소장할 수도 있고, 좋아하는 작가의 소식도 접할 수 있는 아트숍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작업실과 전시장의 중간 단계인 이 공간이 정착되기엔 시기적으로 일렀다. ‘천성명인’은 임대료가 턱없이 비싼 인사동에서 6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내년에 목리 창작촌을 떠나 새로운 곳에 작업실을 꾸리게 되면, 뜻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자생적인 작업 공간을 만들고, 작품을 통해 사회 환원에 참여하는 게 그의 또 다른 꿈이다. 2008년 2월 오픈한 홈페이지(http://chunsungmyung.com)는 타인과의 교감을 꿈꾸는 그가 묵묵하게, 그러나 꾸준히 시도해 온 시도 중 하나다. 사이트 역시 그의 이원화된 세계관이 잘 드러난다. ‘천성명’을 클릭하면 작가로서의 그를 만날 수 있고, ‘人’을 클릭하면 인간 천성명을 만날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 이채롭다.


천성명 | 조각가. 1971년생. 수원대학교 조소과(1999)와 동 대학원(2001)을 졸업했다. 김세중 청년조각상(2007), 벨그라드-Micro-narratives 3등상(2007), 동아미술제 대상(2000), 경기미술대전 우수상(1998) 등을 수상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대학원과 추계예술대학에 출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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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함께 있었을 뿐인데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고양이와 살아본 사람이라면 경험했을 마법 같은 순간이 있다. '고양이 화가' 이경미는 그 소중한 경험을 담아 고양이를 그린다. 그의 그림 속에서 고양이는 모델일 뿐 아니라 마음을 다독여주는 친구이고, 신비한 세계로 인도하는 안내자다. 겉으로 보이는 고양이의 모습은 하나지만, 이경미의 고양이 그림은 보는 이의 마음과 경험의 폭에 따라 여러 겹의 의미를 지닌다. 그의 네 번째 개인전 <李나나+金랑켄>전이 열리는 청담동 표갤러리와 작가의 작업실을 찾아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갤러리에 들어서면, 나란히 걸린 고양이 초상화 한 쌍이 눈에 들어온다. 제목이 각각 <李나나>와 <金랑켄>이다. 성격이 예민하고 때론 까칠한 10살배기 토종고양이 나나가 작가의 성격과 닮았다면, 4살배기 페르시안 친칠라 랑켄은 곧 결혼할 남자친구의 성격과 꼭 닮아서, 예비부부의 성을 붙여 제목을 지었다. 고풍스런 액자를 가린 벨벳 천을 잠시 걷고 그림을 보여준 것 같지만, 이 그림은 섬세하게 그린 눈속임 그림이다. 그림 일부를 가린 듯, 살며시 보여주는 이 천은 이경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아버지가 알코올중독을 앓았고 어머니가 한복집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느라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았어요. 한복집도 번듯한 가게가 아니라 주문받은 일감 떼어다 만드는 그런 영세한 곳이었죠. 근데 어머니의 한복 천을 어깨너머로 보면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어머니가 한복 일을 못하게 되셨을 때, 그 천을 받아다가 지금도 작품에 그리고 있어요.” 



 


 

어머니 마음처럼 상처를 감싸는 그림
지금도 그의 작업실 한 구석에는 한복천이 돌돌 말려 있다. 작가는 어머니 곁에 늘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한복감의 색과 질감, 주름이 만들어낸 세계에 마음을 빼앗겼고, 바라보기만 할뿐 가질 수 없었던 그것들을 그림 속에 그려 넣었다. 넉넉하게 주름져 그림 속에 치렁치렁 드리운 천은, 세상 모든 아픈 것들을 끌어안는 어머니의 마음과 닮아있는지도 모른다.

한복 천과 더불어 이경미에게 마음의 치유를 상징하는 또 다른 대상은 고양이다. 그와 함께 사는 한국 토종고양이 나나(10)와 페르시안 친칠라 랑켄(4)에게는 아픈 사연이 있다. 나나는 방광결석으로 1년 넘게 병치레를 했고, 랑켄은 어렸을 때 목뼈와 두개골을 다친 상태로 뼈가 아물어 얼굴이 15도가량 한쪽으로 기울었다.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비싼 병원비와 마음고생을 감수해가며 이들을 거둔 것은, 고양이도 가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장 고단했던 20대를 함께 한 고양이

“원래부터 고학생이었기 때문에 1998년 IMF가 터졌을 때도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1999년 4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가족들의 생계를 제가 책임져야 했어요. 4학년이었는데 학교 다니면서 새벽까지 아르바이트 하고…. 그해 8월 길에서 5천원을 주고 나나를 데려왔어요. 집에 오면 나나가 은근하게 절 지켜봐주고 ‘냐옹’하고 반길 때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위로를 많이 받았죠.”


하지만 나나가 생후 1년쯤 되었을 때, 갑자기 방광결석이 생겨 수술해야할 상황이 됐다. 어머니는 ‘똥고양이에게 무슨 병원이냐’며 차라리 버리라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나의 수술 날, 모녀는 함께 울었다. 딸은 손도 못 써보고 세상을 뜬 아버지와 아픈 나나의 모습이 교차해서 울었고, 어머니는 딸이 힘겹게 번 돈을 헛되이 써버리는 게 속상해서 울었다. 이후로 병이 재발해 한 차례 더 수술을 하고, 주사로 인한 염증이 생겨 1년 가까이 병치레를 해야 했다. 생계를 위해 바빴던 이경미 대신, 병수발을 어머니가 도맡았다. 병원비와 치료비로 수백 만원이 날아갔다. 오랜 투병 끝에 성격도 까칠해졌지만, 그래도 나나는 여전히 소중한 고양이다.

작업실의 이젤 뒤에 숨은 고양이 나나. 원래 수컷이지만 어렸을 때 성별을 몰라 나나라고 이름 붙였다.

 

소중한 것의 가치는 상대적이다

“저는 고양이를 제대로 못 돌봐줄 때도 많고…. 고양이 애호가는 아니에요. 그보다는 고양이 속에 내재된 ‘주변인’의 모습에 마음이 끌렸던 것 같아요. 하지만 고양이들이 버림받고 길을 돌아다니게 놓아두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지금도 세상의 어디선가 죽어가는 사람이 있지만, 제게는 그 ‘5천 원짜리 똥고양이’를 살리는 게 중요했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고단했던 20대를 나나와 함께 보냈고, 나나가 큰 위로를 줬기 때문이에요. 모든 소중한 것의 의미는 상대적인 거예요.”


이경미가 그런 소중한 마음을 담아 나나를 캔버스에 그리기 시작하자,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품종고양이도 아닌 흔한 토종 고양이를 왜 그리느냐는 사람, 물감이 아깝다는 사람 등 다양했다. 하지만 이경미는 그런 반응을 접하면서 더욱 더 고양이를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낯설어한다는 건, 저처럼 ‘비싼 물감 들여 고양이로 큰 화면을 채우는 짓’을 해본 사람이 지금까지 없었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오히려 더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안 하는 그림일 테니까요.”

 

 

한데 아픈 고양이와의 인연은 나나로만 그치지 않았다. 2004년 둘째로 들인 랑켄은 원래 이경미의 친구가 키우려던 고양이였다. 하지만 고양이가 생후 1개월 되던 무렵 목뼈가 부러지고 두개골에 금이 가는 사고를 당하자 친구는 키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랑켄은 그 상태로 뼈가 굳어 지금도 목을 15도쯤 기울이고 다닌다.   


“제가 나나를 키우고 그리는 걸 보면서, 주변에서도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 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랑켄도 그중 하나였어요. 한데 사고가 생기면서 결국 친구가 랑켄을 포기한 거예요. 사람들이 품종고양이에게 기대하는 어떤 기대치가 있는데, 그걸 충족시키지 못하니까 안락사 될 뻔했나 봐요. 결국 제가 1년 동안 데리고 있다가, 키우게 됐죠. 이름도 두개골에 상처가 있는 ‘프랑켄슈타인’에서 착안해서  ‘랑켄’이라고 지어주었어요.”

랑켄과 함께한 이경미 작가. 어릴 때 목과 머리를 다친 탓에 뼈가 잘못 붙어, 늘 저렇게 한쪽으로 목이 기운다. 

처음에는 성격 까칠한 나나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없었지만, 랑켄이 떠돌이가 되거나 안락사를 당하는 걸 볼 수는 없었다. 마음의 부담을 안고 데려왔지만 ‘개냥이’(개처럼 인간을 잘 따르는 성격의 고양이)라 부를 만큼 사람을 잘 따르는 랑켄은 금세 가족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래도 좀 더 정이 가는 쪽은 역시 나나다. 
“나나가 까칠하기는 하지만, 첫째의 정이란 게  있거든요.”

 


고통도 행복도 언젠가는 지나간다

이경미는 호기심 어린 고양이의 눈망울에 초월을 향한 갈망을 담고, 말없이 다정하게 위로하는 치유자의 역할을 부여한다. 고양이가 유한한 세상의 인간을 상징한다면, 그 고양이가 발 딛고 선 바다와 우주는 인간이 한없이 작아지는 원시적이고 근본적인 세계를 상징한다. 이경미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크게 느껴지는 고통도, 거대한 인생의 흐름 속에서 보면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상대성의 원리를 믿는다.

“사물을 관찰하고, 공간이나 시간이 어떻게 변하는가 보는 걸 좋아해요. 파도, 구름, 지형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들…. 특히 바다는 저를 압도하는 면이 있어요. 오랜 시간 동안 원시 상태를 유지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왔고, 거친 움직임이 있으면서 때론 평온해지는 모습이 인생과 닮았어요.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 이게 나한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저 파도처럼 어느 순간 지나갈 거라고 생각하면 견딜 수 있어요. 좋은 일이 있어도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교만하지 않으려 해요.” 

 

 
일상의 소중함을 수집하는 화가

작가는 부서졌나 싶다가도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고, 거센 바람에 흔들리다가도 다시 평온해지는 파도 속에 마음을 누이고 안정을 찾는다. 그렇기에 마음을 의탁할 파도를 방 안으로, 건물 속으로, 책상 위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자신에게 소중한 의미를 지닌 수집품들을 그림 속에 겹겹이 숨겨둔다. 누군가는 그 요소들을 단순히 장식적인 것으로 치부하겠지만, 그에게는 나름의 의미가 담긴 것들이다.

 


“저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건, 소중한 순간을 수집한다는 의미예요. 사람들이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을 수집한다면, 저는 ‘긍정적 가치’를 수집하죠. 나를 감싸주는 가치, 나를 위로하는 고양이, 매일매일 사랑할 가족들… 그런 일상의 소중함을요. 그림 속의 세계지도를 보세요. 이 지도 위에서 엄청난 일이 많이 일어났지만, 정작 우리가 그 위에서 찾아야할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의미 있는 가치인 거죠.”


그렇게 일상의 소중함을 수집하는 이경미는 오늘도 고양이를 그린다.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소설 《파랑새》에서 행복을 상징하는 파랑새가 멀리 있지 않았듯, 그에게 삶의 가치를 상징하는 동물은 바로 곁에 있는 고양이다. 그와 함께 오랜 시간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남은 생을 함께 할 고양이들이, 그에게는 창작의 영감을 제공하고 호기심의 문을 열어줄 소중한 파랑새인 셈이다. 

작가가 만든 '나나쨈' 시리즈 중 작업실에 남아있는 세 점의 작품. 세 개 모두 손바닥에 가뿐히 올라갈 만큼 작고 앙증맞다. 작가는 일상의 오브제에 그림을 그림으로써, '소중한 대상을 수집한다'는 개념을 부여한다.

이경미의 이번 전시는 오는 10월 7일(화)까지 열린다. 청담역 9번 출구에서 도보 15분 정도 걷다가  횡단보도를 건너 좀 더 올라가면, 그 길 방향으로 오페라 갤러리가 보이는데 이 건물 지하 1층에 표갤러리가 있다. 찾아가는 길 문의는 표갤러리(02-511-5295)


* 전시 전경

 

[문화와 나 | 2007년 가을호]

 “저는 버려짐으로써 사랑을 얻은 존재이니, 버려진 것들의 원과 혼을 이끄는 이가 되겠나이다.”

김선우 시인을 만나러 강원도 원주로 가는 길에, 그가 고쳐 쓴 전래 설화 바리공주의 한 대목을 되짚는다. 핏덩이 때 자신을 버린 아비에게 피로 복수하기는커녕, 그 아비 목숨을 구하고자 저승길 떠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여인, 바리공주가 시인의 몸속에 스며든다. 그의 넋을 입은 시인이 닫힌 입술을 천천히 연다. 생명을 낳고 거두는 모태신의 자궁처럼 아득히 벌어졌다 닫히는 입술로, 아프고 슬프고 괴로운 세상의 모든 혼을 위무하는 노래를 읊는다.


김선우는 2007년 7월 펴낸 세 번째 시집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에서 피 흘리며 죽어간 망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가 조심스레 골라낸 시어를 넋대 삼아 내밀 때, 그 넋대를 타고 파르르 흔들며 이승으로 소환된 망자들이 고통스런 기억을 토해낸다. 온몸에 폭탄을 두르고 적을 향해 뛰어든 팔레스타인 아이들,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가 생지옥을 겪은 열네 살 순애, 세상 구경 한번 해 보지도 못하고 파묻힌 어린 생명들…. 만신이 된 바리공주가 구천을 떠도는 넋을 건져내듯, 시인은 망자들을 위한 천도제를 연다.


관능과 죽음의 이중주

그가 첫 시집에서 보여 준 도발적이면서 건강한 관능미의 세계는 새 시집에서도 여전하지만, 그 사이사이 섬처럼 끼어든 일련의 시들은 다소 낯설기까지 하다. 그러나 기실 그의 시에 녹아든 타자에 대한 시선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대학 시절 학생 운동에 뛰어들어 가투 시를 쓰던 무렵, 이미 그 싹은 시작됐다.


“대학을 들어가서 광주 민주화운동 사진전을 처음으로 봤죠. 담장에 걸린 사진들을 보면서, 내가 전혀 몰랐지만 존재했던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그러면서 급속도로 운동권 학생이 되기 시작했죠. 그때의 경험이 굉장히 큰 영향을 미쳤는데, 덕분에 개인을 넘어선 공동체의 의미를 고민하게 됐어요.”


김선우는 뜻 맞는 학생들과 함께 학생 운동 동아리를 조직해서 시를 썼다. 좋은 혁명가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있어도, 시인으로 살겠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던 때였다. 하지만 학생 운동을 하던 시절에도 그의 시에서는 민중문학 특유의 투박하고 날선 언어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순수 문학 동아리보다 더 치열한 의식을 담아내되, 시로 표현되는 언어는 그들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시어로서의 밀도가 있어야 한다는 자의식이 강했어요. 거친 언어로 일관하다 정작 메시지 전달에는 실패한 1980년대 민중 문학의 오류를 답습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가 학생 운동을 시작했을 때는 이미 사회주의 이념이 몰락하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1992년 대학을 졸업할 때는 노동 현장과의 끈도 대부분 끊어져, 현장 활동을 할 길도 없었다. 절실했던 믿음의 대상이 갑자기 사라지자, 그의 마음도 나락으로 떨어졌다. 모든 상황이 완벽하리만큼 절망적이어서 살아야겠다는 의지조차 사라졌다. 하루는 출가를 생각했고, 그 다음날은 자살을 꿈꾸며 3년을 방황했다. 달리는 기차나 버스를 보면 무조건 올라타야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불안했던 20대 중반, 잠시 몸을 쉬러 간 운문사에서 그는 불현듯 시인이 되리라 결심했다.


“지금도 가끔 그때를 돌이켜보면, 시가 나를 살렸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뒤로는 2년 동안 밤낮 가리지 않고 미친 듯이 습작을 했다. 하루에 두어 시간만 자면서 시를 썼고, 시를 쓰면서 먹고 살기 위한 최소한의 돈만 벌었다. 그리고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10편의 시를 게재하며 등단했다.


시, 산문, 소설을 넘나드는 ‘전업 글쟁이’로 살기 

등단한 지 어느덧 10년을 훌쩍 넘긴 요즘, 김선우는 세 번째 시집 첫머리에 중대 발표를 했다. 앞으로 청탁 받아 쓰는 시는 더 이상 쓰지 않기로 한 것이다. 무엇보다 이제, 지난 10년 동안 써 온 것과는 다른 형식의 발화법을 시도하고 싶다. 오래오래 그의 머릿속에서 무르익어 변화되는 시들이 새로운 언어의 옷을 입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적 여유가 필요할 것이다. 그가 완벽하게 홀로 창작하는 시간을 갈망하는 것도 그래서다. 


“산문은 어떻게든 마감 기한에 맞춰 보낼 수 있지만, 시에 마감 기한이 있다는 건 참 아이러니한 거예요. 기한에 맞춰 시를 써야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내 속에서 뭔가 충분히 고이고 쌓였을 때 꺼내놓는 시와, 마감에 쫓겨 억지로 끄집어내는 시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을 테니까요.”


시인으로 등단한 이후 다른 직업을 갖지 않는 대신, 김선우는 전업 시인으로 살기 위해 스스로 ‘전업 글쟁이’라 부를 만큼 다양한 글을 썼다. 산문을 쓰는 일이 생계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시와 산문으로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무용가 최승희(1911~1969)의 삶을 다룬 시나리오를 쓰다가, 예상 외로 많은 시나리오의 제약조건에 갑갑증을 느껴 소설 쓰기에 도전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갈무리한 기초 자료를 토대로 올 4월부터 구상에 들어갔고,  8월까지 초고를 마무리할 예정이다. 누구나 한번쯤 이름을 들어봤기에 그만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최승희의 이야기지만, 흔한 전기 소설이 아니라, 전혀 새롭고 낯선 소설로 재구성해볼 생각이다.


“소설 쓰면서 생활 리듬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새벽 6시에 잠들었다가 오후 2시쯤 일어나요. 시는 새벽에 몰아 쓰는 게 가능한데, 소설은 정말 체력 싸움이네요.”


8월 말에는 지난 10년간 각종 지면에 쓴 칼럼 모음집과,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지면에 연재한 시를 모아 출간할 예정이다. 김선우의 새 책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올 가을은 풍성한 계절이 될 듯하다.


상처를 보듬는 몸과 몸

‘아무도 더 이상 시를 읽지 않는 시대’라는 말이 문학계 곳곳에서 비명처럼 들려온다. 하지만 김선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글을 쓴다. 기도하듯 시를 쓰고, 밥을 먹듯 산문을 쓰고, 이따금 간식 먹듯 소설을 쓴다. 시를 쓰는 일이 그에게는 삶이고, 치유다.

“산다는 건 세상에서 부대끼며 상처투성이가 되어 가는 일이에요. 하지만 문학은 그런 상처들을 위로하고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어요. 문학은 우리 영혼의 음식 중에서도 가장 질 좋은 음식 중 하나거든요.”


일상의 사물에서 글감을 찾아내고, 그 속에서 사랑할 구석을 찾아내는 시인의 섬세한 눈길은 따뜻하다. 시를 쓴다는 것은 그 대상과 연애하는 일이니, 사랑하지 않고서 좋은 글이 나올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푹 자고 일어나 눈뜬 후에 내가 보는 건, 먹는 것, 만지는 것…. 그 모든 과정 속에 삶의 진리가 있어요. 멀리서 찾을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내 속에 다 있거든요.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눈앞에 보이는 것, 경험하는 것들로부터 글의 영감이 찾아와요.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들이 소중하다는 걸 잊고 살죠.”


김선우가 정제한 시어를 통해 그려낸 풍경은 그 어떤 것보다 생명 살림의 의지가 우선시되는 세계다. 파괴와 약탈, 살육의 그림자가 넘실대는 세상에서 뭇 생명의 숨을 지속하게 만드는 힘은, 몸과 몸의 연대에 있다. 김선우는 그 연대의 힘 역시 사랑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한다. 죽어가는 생명이 있을 때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는 마음, 상처 입고 아파하는 것들을 보듬어 되살리려는 마음이 세상을 구원하는 힘의 가장 큰 원천인 것이다.


“'내 몸에서 태어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생명은 살려야 한다'는 본능적 자각이, 결국 내 몸 아닌 다른 몸도 살려 내게 하잖아요? 몸과 몸이 서로를 보살피고 서로의 상처에 손 내미는, 그런 연대가 없다면 지구의 생체 시계도 머지않아 멈추고 말 거예요.”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를 일어설 무렵, 시인이 먼저 작고 가벼운 손을 내밀어 작별인사를 건넨다. 그의 산문집에서 읽었던 한 구절, “악수를 좋아한다”던 문장이 떠올랐다. 악수를 건네면서 그가 마음속으로 ‘힘내요’ 하고 속삭인다는 것도.
어쩌면 그가 누군가와 악수를 나누는 건, 손금처럼 서로에게 뚜렷이 새겨진 상처를 모른 척 보듬는 행동이 아닐까.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생명을 노래부를 때 그러하듯이, 조심스럽게. 그 부드럽고 따뜻한 힘에 김선우 시의 핵심이 있다.


김선우 | 시인. 1970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강원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으며, 2004년 제49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2000), 《도화 아래 잠들다》(2003),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2007)를 펴냈다. 이밖에 산문집 《물 밑에 달이 열릴 때》(2002), 《김선우의 사물들》(2005), 《내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2007), 동화집 《바리공주》(2003)가 있다. 현재 시힘 동인, 실천문학 편집위원으로 있다.    


영화감독에겐 예술영화라는 타이틀이 찬사인 동시에 낙인이다. 예술영화라면 손사래부터 치는 투자자, 개봉에 난색을 표하는 극장주, 보나마나 어렵고 지루할 거라며 관심도 갖지 않는 관객들을 떠안고 걷는 길은 멀고 험하다.

그러나 민병훈 감독은 현실을 달콤한 판타지로 포장해 팔아치우는 사기꾼보다, 우직한 싸움꾼이 되길 원한다. 영화의 절대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그의 고집은, 영화 <벌이 날다>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집요하고 무모한 삽질과 닮았다. 자신을 극한 상황까지 내몰 때조차, 삽 대신 카메라를 든 민병훈 감독의 ‘삽질’은 결코 무겁지 않다. “깃털처럼 가볍게, 머슴처럼 저돌적으로, 하지만 심각하진 않게.” 그가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픈 삶의 태도는 그러하다.


민병훈 감독이 러시아 국립영화대학 졸업 작품으로 만든 첫 장편 <벌이 날다>(1998)는 그의 영화관뿐 아니라 세계관을 뚜렷하게 드러낸 작품이기에 주목할 만하다. 타지키스탄 고원 마을에서 현지 배우를 기용해 현지어로 찍은 영화는 다소 낯설지만, 그 속에서 감독의 메시지는 생생하다. 모든 과정을 흑백으로 찍고 다시 세피아 톤의 색을 입힌 화면은 마치 시계태엽을 거꾸로 감아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준다. 이 같은 효과가 우화 같은 이야기와 어우러져, 영화 속으로 더욱 몰입하게 된다. 


두려움과 구원은 종이 한 장 차이

<벌이 날다>의 주인공 아노르는 초등학교 교사이자 작가지만, 내기로 한 책은 언제 출간될지 알 수 없고 살림은 늘 쪼들린다. 게다가 옆집 부자는 아노르의 집 담 아래 재래식 화장실을 만들어 수시로 드나들며 아노르의 아내를 훔쳐본다. 아노르는 부자에게 항의해 보지만 묵살된다. 억울한 처지를 하소연하면 도와줄 거라 믿었던 검사마저 “사유재산법도 모르느냐”며 부자 편을 든다. 결국 아노르는 가난한 자의 소소한 행복권마저 지켜주지 못하는 법과 전쟁을 선포한다. 즉 검사의 옆집을 사서 앞마당에 공동화장실용 구덩이를 파면서, 부자 이웃이 자신에게 했던 짓을 검사에게 고스란히 되갚는 것이다. 


아노르가 집요하게 파내려가는 구덩이가 깊어질수록 상황은 점점 파국을 향해 치닫지만, 삽질을 멈출 수는 없다. 무기력한 지식인이었던 아노르는, 삽질이라는 육체적 고행을 통해 일그러진 현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검사가 아노르의 아들에게 도둑 누명을 씌워 협상 카드로 제시할 때조차 단호히 타협을 거부한다.


아들의 자유를 포기한 대신 상처뿐인 싸움을 선택한 아노르는 절망과 고통의 깊이만큼 구덩이를 파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상치 못했던 기적과 직면한다. 그가 판 구덩이에서, 200년 동안 우물 하나 없던 마을에 처음으로 우물물이 솟아나온 것이다. 무덤이 생명의 공간으로 반전되는 순간이다. 민병훈 감독은 삶의 가장 밑바닥까지 걸어 내려가야만 기적과 같은 순간을 대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럿이면서 동시에 하나인, 구덩이와 무덤과 우물이 암시하는 상징은 명료하다.


주인공이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 깨달음을 얻는 설정은 <괜찮아, 울지마>에도 등장한다. 허풍쟁이 청년 무하마트는 도박 빚을 지고 고향으로 도망가지만, 그곳에서도 천성을 버리지 못하고 성공한 음악가 행세를 한다. 거짓된 삶으로 일관하다 고향 사람들에게조차 외면당하는 무하마트는, 돌산을 깨어 집을 짓는 할아버지를 구슬려 돈을 타내고 고향을 뜨려다가 놀라운 비밀을 깨닫는다.

좀 더 원만한 상황을 선택할 수 있을 상황에서도, 민병훈 영화의 주인공들은 유독 극단을 향해 내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극단을 향한다는 것, 끝을 본다는 건 두려운 일이다. 민병훈 감독은 어떻게 두려움을 보여주면서도 구원을 말하는 것일까? 그에게 두려움과 구원은 어떤 의미일까?


“<벌이 날다>에서 아노르의 아들이 이런 ‘그만 파도 되지 않느냐’고 얘기하죠. 하지만 아노르는 ‘끝까지 더 팔 거다’라고 하면서 집요하게 더 파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 않나요. 나 자신을 불사를 정도로 극한까지 몰고 가야 결국 두려움의 실체와 직면할 수 있어요. 그때 바로 구원이 찾아온다고 봐요. 사실 두려움과 구원은 종이 한 장 차이거든요. 그러니 제 영화는 ‘두려움에 대한 3부작’인 동시에, ‘구원에 관한 3부작’이기도 하죠.”

두려움 3부작의 완결판격인 <포도나무를 베어라>에서는 두려움을 넘어선 구원의 메시지가 한층 더 명료해진다. 신학도인 수현은 옛 애인이었던 수아와 견습 수녀 헬레나 사이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용서하고, 또 용서받는다.


모조품 아닌 ‘진짜’를 찍고 싶은 열망

극한 상황에 몰리는 건 영화 속 주인공뿐만이 아니다. 척박한 영화판에서 예술영화를 만드는 감독도 날마다 현실과 싸우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민병훈 감독은 제작비를 줄이기 위한 편법을 쓰지 않는다. 머릿속에 그렸던 풍경을 온전히 재현하기 위해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로케이션을 감행한다.

예컨대 <괜찮아, 울지마>도 한국의 적당히 비슷한 시골 동네에서 한국 배우와 함께 찍었다면 제작비를 훨씬 절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민 감독은 영화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절대 기준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란 말은 그에게 통하지 않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길과 구덩이와 거대한 돌산조차 우직하게 만들어낸다. 세트 촬영은 거부하지만 자연을 있는 그대로 찍는 건 ‘날로 먹는 것’이라 믿기에, 감독의 시선을 담아 풍경을 새롭게 창조한다. 그의 영화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중간 지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세트 촬영, 정말 싫어해요. 그렇게 찍으면 몸은 편하겠죠. 하지만 그건 내 편의만을 위한 거예요. 모조품은 제가 더 잘 알아요. 하지만 진짜를 찍고 싶어요. 그래서 원하는 곳을 일일이 찾아다니다 보니 ‘감독님, 안돼요’란 말을 지겹게 들었어요.

<포도나무를 베어라>에 나오는 수도원도 2년 동안 쫓아다니면서 허락을 구해 찍은 거예요. 처음엔 다들 거절하죠. 다른 데도 많은데 왜 꼭 여기여야 되냐고 물어요. 그건 제가 어떤 여자와 결혼하려는데, 그 여자가 ‘나랑 비슷한 사람 많잖아. 왜 나랑 해야 해?’ 하고 묻는 것과 비슷해요. 당신이니까, 바로 그 장소니까 하는 거예요.”


7년간의 러시아 유학 기간 동안 그는 동양에서 온 낯선 이방인이었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충무로 바닥에서 밑바닥부터 올라온 감독이 아니기에 열외자 취급을 받았다. 자본주의의 논리로 도배된 멀티플렉스 극장가에서도 그가 만든 예술영화는 소외되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천연덕스런 얼굴로 “영원한 이방인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 짧은 말 속에 지난한 그간의 삶이 축약되어 있다. 영화를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줄곧 이방인이었으므로. 하지만 힘겨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겁지 않다. 감독이라며 무게 잡다가 조로하기보다, 차라리 머슴처럼 느물느물 하고 싶은 말을 툭툭 던지면서, 관객들이 생각할 여지를 남길 수 있는 ‘열린 구조’의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한다.


보편성을 띤 무국적 영화를 향한 꿈

민병훈 감독이 지향하는 것은 국가의 색을 넘어선 ‘무국적 영화’다. 오리엔털리즘에 기대기보다 경계를 초월한 보편성을 띤 영화를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란 말은 임권택 할아버지 때나 통할 얘기에요. 사실 그게 껍데기만 보는 거거든요. 그 껍데기를 빼내야 온전한 실체가 남는다고 생각해요. 전 태극기를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제일 이상해요. 이제 제발 국가는 그만 좀 사랑하고, 개인을 사랑하자고 말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렇게 애써 만든 영화도 사람들과 공유하지 못한다면 허사가 되고 만다. 그는 예술영화의 제작 지원보다 중요한 건 접근성을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설파한다. 애꿎은 예산 들여 예술영화전문관을 지어서 오히려 예술영화를 고립시키지 말고, 시내 멀티플렉스 영화관마다 한 관만이라도 다양성을 담보한 영화를 지속적으로 걸어준다면 바랄 게 없다.


“지금 준비하는 작품은 향기에 관한 영화에요. 이제 구원을 뛰어넘어 사람의 향기가 묻어나는, 신의 향기로 소통되는 영화인 거죠.”


‘향기에 관한 3부작’을 준비 중이라는 민병훈 감독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어쨌든’이라는 단표현을 자주 썼다. DVD에 딸린 코멘터리에서도 그랬던 기억이 나기에 감독에게 물었다. 혹시 자신의 입버릇을 인식하는지, 그게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는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긍정적인 인간이거든요. 고생을 많이 했는데도, 딱 보면 고생한 사람 같지 않대요. 편해 보인다고들 하니까요. 아마 그 말을 무의식중에 쓴다면 ‘괜찮지 않아요?’ 정도의 뜻이 아닐까요?”

내가 보기에 그의 ‘어쨌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뜻인 것 같다. 고집스럽고 우직하게 예술영화를 만들어가는 그의 태도처럼. 두렵지만 끝까지 가보려는 진심이 느껴지기에, 그의 영화를 한 번 더 애틋한 마음으로 돌아보게 된다.


민병훈 | 영화감독. 1969년 출생. 러시아 국립영화대학에서 촬영 전공으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았다. 잠셰드 우스마노프 감독과 공동연출한 첫 장편 데뷔작 <벌이 날다>(1998)을 비롯해 <괜찮아, 울지마>(2001), <포도나무를 베어라>(2006)로 이어지는 '두려움 3부작'을 완성했다. <벌이 날다>로 이탈리아 토리노 국제영화제 대상-비평가상-관객상, 그리스 테살로니키 국제영화제 은상(1998) 등을, <괜찮아 울지마>로 체코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 특별언급상-비평가상 등을 수상했다. 최근작인 <포도나무를 베어라>로 부산국제영화제 PPP코닥상(2004)을 받았다. 현재 한서대학교 영상예술학과 교수로 있다.

[문화와 나/ 2007 여름호] 단원들이 모두 떠난 연습실은 적막했다. 누군가 벗어두고 간 토슈즈 한 켤레만 텅 빈 연습실을 지켰다. 동그란 토슈즈 끝은 고작 3cm쯤 될까? 발레리나 김주원(29)은 그 3cm의 지구 위에 몸을 곧게 세우고 춤을 춘다. 발꿈치를 들어 톡, 토슈즈 끝으로 서는 동작은 일견 단순하지만, 이는 김주원이 자신의 몸에 봉인했던 수많은 자아 중 하나를 지금 곧 해방시킬 것이라는 신호다. 마침내 신중히 골라낸 캐릭터를 얇고 가녀린 육체에 덧입는 순간, 김주원은 사라지고 ‘배역 속의 그녀’만 남는다.

죽어서도 연인을 지키려는 지고지순한 지젤, 남자를 농락하는 농염한 여인 카르멘, 운명과 싸우는 스파르타쿠스의 아내 프리기아…. 1998년 국립발레단에 입단해 <해적>의 여주인공 메도라 역으로 데뷔한 이래, 김주원이 연기한 여성상은 시간과 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든다. 데뷔 10주년이 되는 해인 2007년에는, 그의 무대 인생 중 처음으로 한국 무용에도 도전했다. 지난 2월에 열린 안무가 국수호의 창작 무용극 <思悼-사도세자 이야기>에서 혜경궁 홍씨 역할을 맡은 것이다. 현대 무용가, 한국 무용가, 발레리나 등 서로 다른 영역에서 활동해온 예술가들이 장르를 초월해 열연한 이 공연에서, 그는 토슈즈를 벗고 맨발로 춤을 췄다. 익숙한 발레의 움직임에 한국적인 색채를 덧입혀 새로운 인물을 창출해낸 것이다.

“무대에 서면 표정 하나, 손짓 하나에도 제 생각과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나온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늘 새로운 배움이 중요한데, 정작 한국 춤에 대한 경험은 부족했죠. 무대에서 한국적인 색채를 몸으로 표현하는 느낌을 꼭 경험해 보고 싶었어요.” 

서정성으로 승화시킨 한(恨)의 정서 
1992년 러시아 볼쇼이 발레학교에 입학해 6년간 해외 생활을 했고, 1998년 국립발레단에 입단한 후에는 발레에만 몰두했던 그이기에, 한국 무용에 도전했던 이번 공연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특히 지아비와 생이별하는 여인의 처절한 슬픔을 무언극처럼 풀어내면서, 비로소 ‘한(恨)’의 정서를 오롯이 이끌어낼 수 있었기에 무엇보다 뜻 깊다. 김주원은 이 공연에서, 한국 고유의 정서를 자신의 내면으로 체화하는 일에 천착한 듯하다.

이는 단순히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낡은 명제를 답습한 것이 아니다. 2006년 4월, 그가 발레 계의 아카데미상이라고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 최고 여성무용수로 선정되었을 때, 김주원을 높이 평가한 사람들 역시 그의 춤사위에서 묻어나는 한국적 서정성에 높은 점수를 줬다. 

“한이라는 정서에는 한국인만이 지닌 무척 독특한 색깔이 배어 있어요. 외국 사람들은 제 춤을 가리켜 ‘대단히 서정적이고, 섬세하고, 깊은 느낌이 묻어 있다’라고 말하지만, 그 역시 제가 한국 사람이기에 그런 인상을 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김주원은 서구인 중심의 발레 무대에서 태생적으로 도드라질 수밖에 없는 동양인으로서의 핸디캡을 장점으로 승화시킨다. 이는 엄격한 훈련을 거쳐 신체적인 악조건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생생히 드러난다. ‘가장 아름다운 상체 라인을 지닌 발레리나’라는 찬사를 받는 그이지만, 이 역시 타고난 것이 아니다. 매일 아침 9시 반부터 12시간 가까이 반복되는 연습으로 만들어진 몸이다. 흔히 ‘뼈를 깎는 고통’이란 말을 하지만, 발레리나에게는 ‘뼈와 근육의 모양을 바꾸는 고통’인 셈이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무대에서 아름다워 보이는 몸의 라인을 만들고 또 유지할 수 있다.

혹독한 연습으로 만든 ‘가장 아름다운 상체 라인’ 
“일반적인 사람의 기준에서 보면 비정상적으로 보여도, 무대에서 예뻐 보이는 몸의 라인이 있어요. 무릎이 많이 들어가고, 발등의 아치가 높고….하지만 전 그런 신체 조건을 타고나지 못했어요. 기형적으로 뒷목 뼈가 튀어나오고, 목도 너무 길고, 팔꿈치와 어깨뼈가 도드라져서 각이 져 보이거든요.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연습을 거듭한 덕분에 그런 결점도 오히려 아름답게 보인다니 감사할 뿐이에요.” 

김주원에게는 휴가라는 단어가 없다. 근육 끝까지 섬세한 움직임이 전달되어야 하는데, 유난히 뻣뻣한 근육 탓에 하루만 쉬어도 다음 날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휴가 기간이 주어져도, 그동안 연습하느라 제대로 못 받은 물리치료를 꼼꼼하게 받고 혼자 연습실에서 여유 있게 연습하는 데 쓴다. 그렇듯 고된 노력 끝에 만들어진 그의 몸은 얇고 가늘고 섬세하다. 유난히 긴 목 아래 도드라진 쇄골이 목걸이처럼 빛나고, 쇄골에서 어깨뼈로, 다시 팔꿈치에서 팔목으로 이어지는 몸의 굴곡은 봄 언덕처럼 부드럽다. 잔머리가 흘러내리지 않게 듬성듬성 실핀을 꽂고, 색 고무줄로 아무렇게나 동여맨 머리카락도, 마치 고운 비녀로 쪽진 것 같은 단아함이 배어난다.

이런 경험이 있기에, 그는 발레리나가 타고난 재능보다 체계적인 연습과 시의적절한 훈련으로 완성되는 존재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렇기에 한국에 제대로 된 발레학교 하나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한국에서 발레를 하려면, 예중과 예고를 거쳐 대학을 졸업해야 비로소 발레단에 입단하게 된다. 이런 천편일률적인 과정을 답습해서는, 프로 무용수를 육성하는 교육을 제때 받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발레가 제대로 자리 잡으려면, 발레단 산하에 발레학교가 있어야 한다”고 그가 강조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 땅의 발레를 위하여
“무용수로서 왕성한 에너지와 기량을 갈고 닦아나가야 할 시기가 18세, 19세 무렵이거든요. 그런데 프로 무용수 한 명이 만들어지는 9, 10년의 기간 동안 필요한 체계적인 교육 제도가 한국에는 없어요. 그래서 심지어 발레단에 들어와서도 똑같은 스타일의 춤만 익히다가 무용수로서의 인생이 끝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 면에서 보면 저는 운이 좋았죠. 그 시기에 볼쇼이 발레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으니까요.”

1년에 100회 이상 무대에 서는 국립발레단 무용수로 활동해온 지난 10년 간 매너리즘에 빠질 때도 있었고, 해외 진출 권유도 종종 받았다. 하지만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 고국의 관객과 교감하는 무대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에, 그는 선뜻 고국을 떠날 수 없다. 오늘의 ‘발레리나 김주원’이 있게끔 해준 사람들이 바로 한국 각지에 숨은 발레 애호가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주원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해외 무대에 서기보다, 우리 땅 곳곳에 숨은 발레 팬을 찾아 떠나는 국내 공연을 더 소중히 여긴다. 공연 문화의 오지인 해남 땅끝마을에서 열리는 공연도 마다하지 않는다. 지난 5월 여수시민회관에서 열린 국립발레단의 대중 발레 프로그램 ‘해설이 있는 발레’에 공연자 아닌 진행자로 나선 것도, 일반 대중 속으로 스며드는 공연을 지향하고 싶은 소박한 꿈이 담겨 있다.

김주원은 연습실과 집, 공연장을 단조롭게 오가는 생활 속에서 자칫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새로운 자극을 일상 속에서 찾는다. 부상과 바쁜 공연 일정 탓에 휴학했던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도 올해 복학했다. 열 살 이상 차이가 나는 어린 후배들과 동기생이 되어 공부하지만, 늦깎이 학생의 삶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쉬지 않는 배움이 자신을 키운다고 믿는다.

“사람들이 저보고 ‘호기심 천국’이라고 그러는데요, 궁금한 건 꼭 알아야 되고, 모르는 건 부끄러워하지 않고 잘 물어보거든요. 영화나 책 보는 것, 음악 듣는 것도 좋아하고…. 제 춤을 만들어가는 과정도 뭔가 대단하고 투자하고 배워서 얻는 게 아니라, 제가 바라보는 것들 생각하는 것들, 또 말하는 것 하나하나…그런 일상 속에서 얻어지는 것 같아요.

프로 데뷔 10주년을 축하하는 주변 사람들의 인사에도, 김주원은 “지금껏 춤추며 살아올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 10주년이라는 햇수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어떤 역할을 맡았을 때도 무대에서 관객들과 호흡하며 춤추는 시간 자체가 모두 자신에게 성장의 동력이 되어 주었기에, 10년의 세월 동안 맡았던 배역 중 특별히 애착이 가는 역할을 꼽기도 어렵단다. 제 열 손가락을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듯이 말이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배역이나, 삶의 전환점이 된 무대를 꼭 짚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무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그에게도 역할 모델이 되어준 사람은 있다. 1960~70년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발레리나, 나탈리아 마카로바다.

그림자에도 표정을 담는 프리마돈나  
“나탈리아 마카로바는 태생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무용수지만, 그 이전에 손가락의 아주 작은 움직임 하나, 눈빛 하나까지도 자기만의 의미를 만들어 내고, 거기에 영혼까지 불어넣은 듯한 느낌이에요. 그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제게는 모두 감동이었어요.”
평소 무대에서는 근육의 움직임 하나, 숨쉬는 동작 하나도 의미가 없으면 하지 않는다고 천명했던 그였기에, 마카로바의 공연에 깊이 공감하는 이유를 알 듯했다. 두 발을 곧추세우고 손가락을 살포시 하늘로 들어 올린 그의 모습을 다시 바라본다. 저 손끝은 어떤 단어를 몸짓으로 바꾼 것일까. 불상의 수인(手印)처럼 수많은 언어를 담은 손을 하늘로 향한 채, 그가 어둠 속에 서 있다. 무심한 손끝의 움직임, 어둠 속으로 흐려지는 그림자 속에도 표정이 있음을, 김주원의 춤 속에서 다시 본다.

김주원 | 1978년 부산 출생. 1992년 러시아 볼쇼이 발레학교로 유학을 떠나 6년간의 교육 과정을 마치고 1998년 국립발레단에 입단했다. 같은 해 <해적>의 메도라 역으로 국립발레단 최연소 주역을 따냈다. 한국발레협회상(2000)을 비롯해 러시아 모스크바 국제발레콩쿠르 동상(2001), 문화부장관상(2002), 한국발레협회상 프리마 발레리나상(2002), 제36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04), 제14회 브누아 드 라 당스 최고 여성무용수상(2006년)을 수상했다. 현재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