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미터 앞에서 저를 발견한 길고양이, 순간 몸을 움칫하더니
도망갈 구멍을 찾습니다. 아무래도 처음 본 낯선 사람에게
경계심부터 들었던 모양입니다. 한데 통통해진 몸집 때문에
어린 시절 즐겨 숨던 하수구멍엔 도무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아기고양이 몸집이라면 쏙 들어갈 정도의 하수구멍이지만
이제 어른이 되어 잔뼈가 굵어지고 통통해진 길고양이에게는
아무래도 저 곳은 피난처로 무리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이곳을 제 집 삼아 살아왔을 길고양이에겐
어디로 가면 숨을 수 있을지, 인간의 손을 피할 수 있는지
모두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겠지만, 예전의 어리고 가녀린
몸매가 아니라 통통한 중고양이로 훌쩍 자랐다는 것은
미처 계산에 넣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옛날엔 분명히 저 구멍에 쏙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런 낭패가..."
짧은 순간에도 길고양이의 표정에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본다면 진땀이라도 흘릴 기세입니다.
고양이는 끝까지 가지 않고 눈앞에 어슬렁거리는 저를
슬그머니 올려다봅니다. 그러나 긴 생각을 할 여유는
없습니다. 늦기 전에 마지막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무리를 해서라도 하수구멍 속으로 뛰어들어 볼지,
아니면 인간이 선 반대편으로 냉큼 뛰어가야 할지...
몸을 돌리면서도 미련이 남았는지, 다시 한번 하수구멍을 봅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무사히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억지로 들어갔다가 중간에 뱃살이라도 끼어 꼼짝 못하면
그것처럼 굴욕도 없습니다. 인간에게 붙잡히기라도 한다면...
차라리 이젠 예전 몸집이 아니라는 것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줄행랑을 치는 게 안전하다고 여긴 길고양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립니다. 비록 모양빠지는 일이긴 하나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낮은 포복으로 달아나는 길고양이 뒷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어쩐지 쓸쓸해 보입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더 이상
어린 시절 즐겨하던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른이라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어른이기에 할 수 있는
일들에 조금씩 적응해 나가는 것, 그게 진짜 어른이 되는 과정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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