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 03. 2002 | 17세기 바로크미술의 거장 렘브란트(1606∼1669)를 뛰어난 유화작가로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가 뛰어난 판화작가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2002년 2월 17일까지 예술의전당 제2전시실에서 열리는 렘브란트 판화전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판화가 렘브란트’의 면모를 접할 수 있는 국내 최초의 전시다. 전시되는 판화 90점과 에칭 원판 2점은 렘브란트하우스뮤지엄 소장작품 2백50점 중에서 엄선한 것으로, 구약·신약성서 장면화, 자화상, 누드화, 풍경화, 초상화 등 렘브란트 판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판화가 렘브란트’의 숨은 면모 소개해
평생 2백90점의 판화를 제작했던 렘브란트는 15세기 네덜란드 동판화의 거장 마르틴 숀가우어, 16세기 독일작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뒤를 이어 판화를 독립된 예술장르로 격상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드라이포인트 같은 기존의 판화기법에 제작과정이 간편한 부식동판화 에칭을 접목해 선의 강약과 미묘한 명암변화를 자유자재로 다룬 그의 판화는 어둠과 빛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대상을 부각시키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기법이 특징이다. 흑백의 명암으로만 대상을 표현하는 단색판화는 이 같은 렘브란트의 특성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매체였다.
렘브란트의 판화에 유독 구약·신약성서의 장면을 묘사한 작품들이 많은 것도, 그가 묘사한 빛이 고요하면서도 강렬해 극적인 사건들을 묘사하는 데 적합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의 대표작 ‘설교하는 예수’(1643∼49)는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사건들을 종합한 것으로, 한 팔을 내밀고 다른 팔은 하늘로 향한 예수의 모습은 어둠 속에서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 두드러져 보인다.
이 작품은 ‘인물이 아니라 감정을 그렸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인물의 적절한 생략과 강조로 강약을 살린 화면 구성도 돋보인다. 예수를 보기 위해 아이를 안고 나온 어머니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 치유를 기다리는 병자와 그 가족들이 애처롭게 갈구하는 모습, 의혹을 잔뜩 품은 바리새인들의 표정 등이 생동감 넘치는 그의 판화는 당시 ‘1백 길더 짜리 판화’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고가에 팔리기도 했다.
어둠 속에서 더욱 강렬하게 살아나는 빛의 드라마
그러나 렘브란트는 젊은 시절 인정을 받았던 반면 말년에는 파산 등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대중의 요구와 작가 자신의 고집스런 자의식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전통적 도상인 ‘아담과 이브’(1638)를 젊고 아름다운 남녀 대신 뱃살이 축 늘어진 중년의 촌부로 묘사한 것이나, 성기를 가린 나뭇잎을 과감히 치워버린 것 등은 전대 이탈리아 미술의 이상화된 인물상에 반기를 든 렘브란트의 회화관을 반영한다.
특히 자의식이 강했던 렘브란트의 내면을 거울처럼 반영한 자화상은 그 변천사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작업실에서 막 얼굴을 쳐든 듯한 그림, 동양 취향을 반영한 이국적인 복장의 그림, 첫 부인 사스키아와 함께 한 그림 등 그가 남긴 수많은 자화상은 부스스한 곱슬머리와 두툼한 코, 작은 눈을 가진 평범한 중년 사내의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함이 넘친다. 특히 귀족 복장을 하고 모자를 비스듬히 눌러쓴 채 자신만만하게 정면을 바라보는 1639년의 자화상은 라파엘의 초상화 양식을 본뜬 것으로, 대가들의 작품과 겨루고자 하는 예술가의 자부심을 읽을 수 있다.
한편 미술평론가 유재길씨는 “렘브란트의 예술은 고전회화의 명료성에서 벗어나 불명료성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표현양식으로 후대에 영향을 끼쳤다. 특히, 그의 판화는 회화보다 더 과감히 명료한 세부묘사를 거부하면서 바로크라는 시대적 양식을 창조하는 데 큰 힘이 됐다”고 밝혔다.
예술의전당 미술관 개관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며, 입장마감은 4시까지다. 관람료 성인 5천원, 학생 3천원. 자세한 문의는 02-580-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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