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 10. 2002 | 살다보면 누구나 크고 작은 생채기 한둘쯤은 마음에 새기게 마련이다. 특히 한국 국민들의 경우 일제 식민지, 전쟁과 분단, 군부독재 등 수난의 역사 속에서 고통받은 기억은 물론, 현대인이 보편적으로 겪는 인간소외나 우울증 등 내적 상처의 양상이 다양하다. 그러나 이를 치유하려는 노력은 사적인 영역에만 머물렀던 것이 현실이다. 2월 27일까지 예술의전당 1·6전시실에서 열리는 ‘시대의 표현 - 상처와 치유’전은 유·무형적 폭력에 상처받은 삶의 양상을 공론화하면서 미술의 힘을 빌려 상징적 치유를 시도한다.
크고 작은 상처의 상징적 치유를 꿈꾼다
‘상처와 치유로서의 미술’, ‘상처와 치유-치유의 제의식’, ‘폭력과 상처에 관하여’라는 세 개의 소주제로 나뉜 본 전시에는 회화, 판화, 사진, 조각, 설치, 영상분야의 작가 27명이 총 1백여 점을 출품했다. 참가작가들이 다룬 주제도 일본군 성노예 문제, 전쟁으로 고통받는 제3세계 국민, 인간복제로 인한 생명 경시 등 정치·사회적인 문제에서부터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 유아기적 퇴행, 색채심리분석에 이르기까지 다채롭다.
이번 전시는 단순히 감상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관람객의 직접적인 참여로 완성되는 작품이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설치작가 이미혜의 ‘상처의 부피’. 백지에 빨간 펜으로 마음 속 상처를 적고, 문서세단기에 넣으면 시원한 소리와 함께 가늘게 잘린 종이가 발 밑으로 후두둑 떨어진다. 관람객은 고민을 글로 적는 동안 자신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되새길 수 있고, 잘게 잘려나가는 종이를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 더미는 일정량이 모이면 비닐봉지에 담겨 한쪽에 쌓이는데, 얄팍한 종이가 실질적인 부피를 지닌 사물로 변모하는 과정은 추상적이고 모호한 상태로 머물렀던 상처가 그 프로젝트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에게서 떨어져나갔음을 상징한다.
작가와 관람객이 함께 하는 상호소통의 장
그밖에도 관람객들이 인주를 묻힌 손가락으로 일본군 성노예로 살았던 할머니의 얼굴을 찍어내는 손도장 판화를 선보인 정원철, 손톱만한 벨크로 조각 모자이크를 통해 작은 개체일지라도 함께 하면 큰 힘이 됨을 보여준 김수진, 모든 입영자들이 획일적으로 받는 총검술 훈련을 풍자한 정영훈의 영상작업 ‘혈통프로그램’ 등은 작가와 관람객의 상호작용이 돋보였던 대표적 예다.
참여작가들에게 ‘미술이 과연 내적인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란 질문은 우문이다. 맺힌 이야기를 속 시원히 내뱉는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짐을 어느 정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관람자가 이를 계기로 자신의 고통스런 기억을 끄집어내고 타인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 역시 미술의 치유적 기능 중 하나다. 그런 면에서 보면 작가들은 사람들이 겪는 다양한 삶의 상처 중 일부를 끄집어내 대신 앓아주는 사람들인 셈이다. 생산적 유희로서의 미술과 치유를 결부시킨 본 전시는 1980년대 민중미술의 방식과는 또 다른 미술의 현실참여적 가능성을 보여준다.
예술의전당 전시감독 유재길씨는 “자아 탐구를 주제로 사회적 공감대 형성, 적극적 대중 참여를 기본 개념으로 했다”며 “일상의 오브제 작품을 비롯한 대중매체의 사용으로 상호연결을 꿈꾼 미래지향적 전시”라고 밝혔다.
이번 전시의 개관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관람료는 성인 3천원, 학생 2천원. 또한 본 전시와 렘브란트 판화전을 함께 관람할 수 있는 패키지 상품이 6천원에 판매된다. 문의전화 02-580-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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