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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제품 | 전시 | 공연

퀼트처럼 무한히 이어지는 끈끈한 관계망

by 야옹서가 2002. 1. 17.

 Jan. 17. 2002
| 몸에 걸치면 아련하게 속살이 비칠 듯, 반투명한 천 한 장이 허공에 매달려있다. 하늘하늘한 모습이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구멍이 뚫릴 듯하다. 그러나 한 걸음 다가가면 뜻밖의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길이 3센티미터, 너비 1센티미터 가량의 스카치테이프 도막이 무수히 연결된 ‘퀼트 아닌 퀼트’가 천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1월 8일부터 21일까지 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 2층에서 열리는 김경주전은 이처럼 일상의 소모품에서 서정적인 감수성을 이끌어낸 작품 6점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숙명여자대학교(1996)와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아트(1999)를 졸업한 작가의 첫 개인전이다.

자르기, 이어 붙이기, 누르기로 연결되는 무한한 관계망
작가가 즐겨 사용한 소재는 3M 테이프부터 마스킹 테이프, 상처에 붙이는 일회용 밴드 등 일회적이고 소모적인 공산품이다. 속도와 간편함을 추구하는 인스턴트 문화의 속성을 담은 재료임에도 불구하고, 완성된 작품에서는 서정적이고 몽환적인 이미지가 넘실거린다. 절제된 색면과 단순한 형태만 볼 때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듯 하지만, 김경주는 이 같은 미술사적 분류보다 재료의 속성과 제작 과정에서 반복되는 행위, 즉‘누르기’에 내포된 의미를 중시한다.

유학 시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책상에 놓인 테이프를 붙이며 시간을 보냈던 경험이 작품의 모티브가 된 탓인지, 반복적으로 테이프를 잘라내는 작업은 ‘응…그런데……있잖아…그래서………’와 같은 식으로 하염없이 독백하는 사람을 연상시킨다. ‘white telling’(1999),‘green telling’(1999) 등의 작품 제목은 이를 뒷받침한다. 간편하게 뜯어 쓰고 버리는 접착재료의 일회적 속성 역시 소모품으로 전락한 현대인의 고립된 내면을 반영한다. 그러나 잘라낸 테이프를 균일한 간격으로 붙이고 서로 떨어지지 않도록 손으로 꼭꼭 누를 때, 작품의 제작 과정은 타인과의 끈끈한 연대를 의미하는 상징적 행위가 된다. 이는 의미 없이 흩어졌던 독백의 분절음이 대화의 단계에 다다르면 소통 수단이 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밴드로 상처를 감싸듯, 갈라진 곳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이듯
 예컨대 반투명한 살색 밴드에이드를 잘라 4미터 정도의 길이로 이어 붙인 ‘landscape’(2001)은 일회용 밴드로 상처를 감싸고 치료하듯, 연대를 통한 내적 치유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landscape’은 밴드의 빛깔과 모양 때문에 피부를 얇게 떠서 만든 갑옷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어머니의 한복 치마를 펼친 듯 넉넉하고 따뜻하게 보인다. 직사각형, 정사각형 등 기하학적인 도형의 기본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손으로 만든 그의 작품에서는 완벽한 직선을 찾아볼 수 없다. 균일한 모양과 크기로 제작된 밴드를 이어 붙이는 과정에서 보다 자유롭고 유기체적인 형태로 바뀌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공미와 인간미가 교차하고, 여리고 약해 보이는 외양 뒤에 강인함이 내포된 것이 김경주 작품의 특징이다.

작가 김경주는 “테이프를 자르고 눌러 붙이는 행위를 통해 퀼트처럼 제작된 내 작품의 기본 전제는 사랑”고 설명하고 “전시준비 과정에서 조명이 부실했고 작품 디스플레이 시간이 부족한 점 등 미술회관 측의 적극적인 협조가 부족한 것은 문제”라며 아쉬움을 표시했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없으며 개관시간은 오전 10시에서 오후 6시까지다. 자세한 문의는 02-760-4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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