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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제품 | 전시 | 공연

일상적 사물의 표피에서 추출한 고요한 풍경 - 구자승전

by 야옹서가 2002. 1. 24.

 
Jan. 24. 2002 | 세상에서 가장 그리기 쉬운 것과 그리기 어려운 것은 무엇일까? 전국시대 사상가인 한비자는 “도깨비가 가장 그리기 쉽고, 개나 말이 가장 그리기 어렵다”고 했다. 도깨비를 본 사람은 없으므로 닮게 그렸는지 알 수 없지만, 개나 말의 모습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어 조금만 틀리게 그려도 눈총을 받기 때문이다. 오래된 예화지만 오늘날에 비춰봐도 그릇됨이 없는 말이다. 그만큼 사실주의 회화작가로 살아가기란 예나 지금이나 어렵다. 30년에 가까운 작가생활 동안 일관되게 사실주의적 화풍을 견지해온 구자승(61, 상명대 교수)의 작품세계가 새삼 돋보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갤러리 고아미에서는 개관기념전으로 1월 16일부터 29일까지 중진 서양화가 구자승 초대전을 개최한다. 오지호미술상(2000) 수상 및 개인화집 발간기념전을 겸해 개최한 이번 전시에서는 1970년대 말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제작한 정물화, 인물화 및 드로잉을 포함한 총 1백20여 점이 소개된다.

30년을 견지해온 사실주의 화풍의 정수 한 자리에
 구자승이 다루는 대상은 정물, 인물, 풍경 등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정물화다. 예컨대 2001년작 ‘정물’은 꽃병이나 술병 등 수직적인 정물과 넓적한 질그릇 같은 수평적 정물이 어우러지고, 화면 하단에서는 과일이나 계란 등 둥그스름한 사물이 수직과 수평의 관계를 가볍게 흔들면서 숨구멍처럼 시선을 잡아끈다. 작은 화폭 안에 등장하는 몇 개의 정물들이 관람자의 시선을 수직과 수평으로 교직하며 펼쳐 보이는 긴장감은 사뭇 팽팽하다.

유화와 같이 서구에서 도입된 매체를 통해 정물을 다루지만, 구자승의 정물화는 동양적인 정서와 맞닿아있다. 이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미묘한 회색조로 배경을 균일하게 처리해 여백의 미를 살렸기 때문이다. 단순한 배경 앞에서 정물은 각각의 사물이 지닌 색채의 생생함과 묘사의 정밀함이 도드라진다. 또한 대상을 화폭의 중심부에 집중적으로 배치한 구도는 정적인 느낌을 강하게 증폭시킨다. 숨죽인 듯 시간이 멈춰서고, 은은한 빛이 사물 위에 먼지처럼 사뿐히 내려앉는 절대고요의 순간은 구자승의 그림을 대표하는 특징 중 하나다.

한편 구자승은 인물화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전두환 전 대통령 초상, 송강 정철 영정 등을 그리기도 했다. 유화, 수채화 등과 함께 전시된 활달한 필치의 크로키나 정밀한 데생에서는 수많은 인체 드로잉으로 인간의 몸을 치밀하게 분석한 노작가의 창작열을 엿볼 수 있다.

미술평론가 박용숙씨는 구자승의 정물화를 가리켜 “그의 풍경화나 인물화에서 보듯이 전반적으로 삶의 일상성 속에서 초탈해 있고자 하는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한 바 있다. 관람객의 시선과 감정을 역동적으로 자극하는 설치미술이나 미디어아트가 기세를 더하는 요즘 회화의 입지가 좁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일상성인 사물의 표피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이끌어내는 사실주의 회화의 매력은 아직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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