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뷰-제품 | 전시 | 공연

보이지 않는 도시공간의 심리지도를 그린다

by 야옹서가 2002. 1. 17.

 
Jan. 17. 2002 | 길모퉁이나 공사장 구석에 한 더미의 흙이 쌓여있다 한들 주목할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일부러 세운 게 분명한 흙 기둥이 뜬금없이 운동장이나 공원 한가운데 버티고 서 있다면? 같은 사물을 놓고서도 주변 상황이 어떤지에 따라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달라질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월 11일부터 22일까지 대안공간 풀에서 열리는 ‘30대 작가기획: 김기수’전은 도시공간 안에서 특정한 사물이 유발하는 시각적 체험을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한 ‘경계탑’, ‘성형’ 등 사진연작과 흙 설치물 등을 선보인다.

현실과 비현실, 그 얄팍한 심리공간의 경계
김기수는 도시의 심리지리(psychogeography)를 새롭게 해석하고 한국 현실에 적용, 실험하는 도시주의 연구모임 ‘플라잉 시티’에서 활동중이다. 심리지리란 도시비평 방법의 일종으로, 지리를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대신 환경을 인식하는 사람의 심리적 기록을 중시한다. 따라서 김기수의 심리지도 역시 공간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즉 보이지 않는 정신적 영역을 다룬다.

예를 들어 ‘경계 탑’연작은 사유지와 국유지의 경계선, 공사장, 운동장, 놀이터 등 서로 다른 맥락을 지닌 도시 공간에 직사각형의 흙 기둥을 세우고 사진을 촬영했다. 이로써 동일한 사물이 다른 환경 속에서 새롭게 해석되는 모습을 비교할 수 있다. 재료 자체만 놓고 보았을 때는 더없이 자연스럽지만, 직사각형의 인공적인 형태로 변모하면서 낯설어진 흙 기둥은 주변환경을 이질적인 것으로 인지하게끔 유도한다. 

이는 또 다른 사진연작 ‘성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길모퉁이, 자동차 뒷바퀴, 계단 한 구석, 심지어는 서 있는 사람의 한쪽 발 옆에 이르기까지 흙무더기를 쌓아놓음으로써 다양한 상황을 연출한다. 사진만 보아서는 흙무더기가 골목 청소를 하고 남은 흙을 모아 쌓아놓은 것인지, 누군가 일부러 갖다놓은 것인지 모호한 것도 있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김기수의 실험은 현실이 비현실 공간으로 전이되는 순간의 기묘함을 포착한다.

유령처럼 도시 위를 떠도는 정서를 채집하다
흙을 이용한 일련의 연작과 함께 눈에 띄는 것은 종이테이프와 칼라시트를 사용해 옥상에 그려낸 거대한 그림들이다. 그가 그려낸 그림들은 도시공간을 구성하는 다양한 구성원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다세대 주택 옥상 위에 수없이 많은 문이 그려진 평면도(‘상대원동 내부’, 2001)나 옥탑방 담벼락에다 국제우편봉투 모양을 그려 넣기도(‘필리핀 노동자의 집’, 2001) 하고, 숨어있는 가상의 스텔스기를 향해 깜짝 놀랄 만큼 큰 목소리로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네기도 한다(‘stealth’, 2001).

마치 나스카의 거대한 지상그림처럼 높은 곳에 올라가야만 전체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김기수의 그림들은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분명 도시 위를 유령처럼 떠도는 이주노동자의 정서를, 우방을 자처하는 미 군국주의의 감시하는 눈길을, 다세대 주택에서 고달프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을 건져내 보여준다.

작가 전용석은 전시서문에서 “그 사진들은 이미 신기루와 같은 공간을 한 번 더 신기루처럼 만들기 위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이 신기루처럼 와해되는 압력에 대한 저항으로 읽어야 한다”며 김기수의 작품을 평가했다.

도시주의 연구모임 ‘플라잉 시티’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동영상으로 제작된 작업현장 스케치(11분 15초)를 감상할 수 있다. 대안공간 풀의 개관시간은 오전 11시∼오후 6시 30분까지이며, 수요일은 정오∼8시까지다. 관람료 무료. 문의전화 02-735-480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