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 08. 2002 | 어떤 사람에게 누군가와 닮았다는 말은 칭찬일 수도, 욕일 수도 있다. 특히 작품의 고유성과 독창성을 중시하는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다른 사람과 닮았다는 말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사간동 갤러리현대 1, 2층과 지하 1층에서 1월 17일부터 2월 15일까지 열리는 김상유 전작전을 보면 자연스럽게 어떤 이름이 떠오른다. 바로 장욱진이다.
적막하리만큼 고요한 사색과 명상의 공간
김상유가 1960년대에 제작한 동판화와 목판화를 비롯해 1970년대부터 1999년까지 제작한 유화 1백여 점을 선보인 이번 전시는 그의 40년 창작활동을 결산하는 자리다. 김상유의 작품은 명상적 풍경, 속세를 초탈한 듯한 등장인물은 물론이고, 민화처럼 해학적이고 친근한 그림체, 정자와 해, 달, 새, 나무 등의 소재가 좌우대칭으로 등장하는 화면 구도 등이 장욱진의 작품과 많이 닮았다. 게다가 작년 이맘 때 이곳에서 장욱진 10주기전이 열리기도 한 만큼, 두 사람의 작품세계가 비교될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작품을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본질적인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장욱진의 그림에서 일필휘지의 드로잉 같은 활달하고 시원한 맛이 풍긴다면, 김상유의 그림은 정원에 서 있는 벅수를 보는 듯하다. 무딘 정으로 돌을 조금씩 쪼아내 만든 듯, 소박하지만 견고한 느낌 때문이다.
또한 두 사람의 그림은 어린아이들이 흔히 그러하듯 투시도법으로 집이나 정자를 그려낸 점이 비슷하지만, 그 안에 담긴 기본적인 정서 역시 서로 다르다. 전업작가인 탓에 생계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장욱진이 그림 속에 집을 짓고 가족을 함께 그려 넣어 애틋한 가족사랑을 표현했다면, 작가 외에 다른 사람의 모습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김상유의 집은 적막하리만큼 고요한 사색의 공간이다.
그림 속 정자의 현판에 내걸린 ‘무심정’, ‘하향정’, ‘낙락정’ 등의 휘호는 김상유가 지향하는 관조적 명상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는 연세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으면서도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해 전업작가로 전향한 작가의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숱이 적은 염소수염에 벗겨진 머리, 둥글납작한 얼굴을 꾸밈없이 드러내고 가부좌를 틀고 앉은 그의 자화상은 늘 실눈을 살풋 감고 있는데, 번잡한 세상을 떠나 그림에만 몰두했던 작가의 모습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한국 판화 1세대로서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어
또한 김상유는 새로운 장르 개척에도 적극적이었다. 한국작가 중 최초로 동판화 작업을 시작했고, 1970년 동아일보에서 주최했던 제1회 국제판화비엔날레에 ‘막혀버린 출구(No Exit)’를 출품해 대상을 수상했다. 갤러리 지하 1층에 목판 및 동판 원판과 나란히 전시된 판화 속에서 1960년대 실험정신으로 가득했던 작가의 젊은 시절을 되짚어볼 수 있다.
갤러리현대 측은 이번 전시를 기념해 김상유의 유화 1백20여 점과 판화가 수록된 도록을 출간했다. 40년 간 외길을 걸어오다 녹내장으로 작업이 어려워진 작가에게 여러모로 힘을 북돋우는 전시가 아닐 수 없다. 전시관람료 무료. 문의전화 02-734-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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