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 22. 2002 | 대안공간 루프에서는 2월 9일부터 3월 2일까지 캐나다 작가 바루흐 고틀리프의 ‘피부 위를 밟기’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 고틀리프는 파편화된 인체 이미지로 패턴화된 종이를 만들어 벽과 바닥을 도배한 사진설치작품을 선보인다.
삐걱대는 나무 계단을 밟고 지하 전시실로 내려가면 보이는 작품은 단 한 점이다. 한쪽 벽면으로부터 시작돼 전시실 바닥 전체를 메운 거대한 사진 한 장이 출품작의 전부다. 비슷한 무늬가 대칭을 이루며 반복적으로 나열된 사진 속에서 피사체의 정체를 식별할 수 있는 익숙한 형상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포장지나 벽지의 패턴처럼 반복되는 형상들은 익명의 남성과 여성의 몸이, 살과 살의 요철이 서로 뒤엉켜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엉덩이나 항문, 성기로 추측되는 신체 일부분이 어지간한 음화 못지 않게 적나라한 모습으로 드러나 있다.
일체의 감정이 거세된 성적 이미지
그러나 성애사진이 흥분제 역할을 한다면, 고틀리프의 사진들은 성적 욕망에 찬물을 끼얹는다. 마치 직물을 짜듯 규칙적인 형태로 반복된 육체가 그려내는 풍경은 스펙터클하긴 하지만, 흥분이나 수치심을 유발시키는 대신 관람자를 무덤덤하게 만들어버린다. 관람자는 금기 때문에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몸의 파편들을 허리를 구부려가며 자세히 들여다보지만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은 인간적인 감정과 분리된 노르스름한 고깃덩어리의 이미지이며, 말 그대로 ‘벽지의 패턴’에 불과하다.
이 같은 점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장치로 고틀리프의 사진이 벽에 걸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닥으로까지 이어진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관람자는 자신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기묘하게 변형된 신체 이미지를 발로 짓밟으며 작품을 감상한다. 비록 사진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의 피부 위를 밟는 행위는 불편한 감정을 유발시키는데, 고틀리프의 사진은 신체를 다루면서도 인간의 고통이나 욕망이 거세된 사물 그 자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관람객은 불편함이나 죄책감을 덜어버리고 그런 풍경에 익숙해지게 된다.
결국 고틀리프의 사진은 마치 벽지나 포장지처럼 감정이 배제된 채 개성이 말살된 공산품이나 일종의 장식적인 사물처럼 소비되는 현대인의 몸을 벌거벗겨 거울처럼 적나라하게 비춘다. 그 안에 담긴 육체는 어느 누구의 몸도 아닌 동시에, 그 누구의 몸도 될 수 있다.
공산품처럼 소비되는 육체에 대한 풍자
대안공간 루프 큐레이터 안성열씨는 “고틀리프의 인체패턴 디자인은 육체를 순화시켜 보여줌으로써 성을 일상의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단순한 디자인처럼 묘사한다. 이것은 성행위에 관한 관념과 실제 사회에서의 불일치를 풍자하거나, 육체에 관한 다양한 성적 담론들에서 벗어나 마치 디자인처럼 육체를 편하게 바라보자는 제안으로도 해석된다”며 다양한 각도에서 작품의 의미를 설명했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없으며, 개관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8시까지다. 부대행사로 2월 23일(토) 오후 6시에 대안공간 루프에서 작가가 주최하는 매스미디어 아트 워크샵이 개최될 예정이다. 자세한 문의는 02-3141-1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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