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 08. 2002 | 자연 친화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식물성’이란 단어 앞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다. 이 단어가 ‘동물성’이라는 대립항과 나란히 쓰일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작가가 식물을 소재로 삼아 작업할 때는 이같은 이분법적 해석만이 적용되지는 않는다. 강조되는 것은 식물의 물성 자체일 수도, 그 속에 담긴 인간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림이나 조각 속에 담긴 식물의 이미지는 작가가 추출해낸 작은 세계상이다.
종로구 화동 pkm갤러리에서 2월 2일부터 3월 2일까지 열리는 ‘식물성(Botanique)’전은 김홍주, 안토니오 무라도, 한스 스탈더(이상 회화), 배병우, 노부요시 아라키(이상 사진), 영국의 데이빗 내쉬(조각) 등 6명의 작품 20점을 선보이면서 식물이란 소재에서 얼마나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는지 보여준다. 참여 작가 중 네 명이 꽃을 다뤘지만, 전달하는 바가 저마다 달라 흥미롭다.
6인 6색-식물 안에서 펼쳐지는 강한 생명력
예를 들면 김홍주는 속눈썹처럼 가느다란 붓으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거대한 꽃 그림을 그려낸다. 오랜 시간과 인내심을 요구하는 창작과정은 구도에 가깝다. 한 화면에 한 송이씩, 원형을 그리며 피어난 꽃 그림들이 만다라를 연상시키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김홍주의 노작에 비하면 한스 스탈더와 안토니오 무라도의 꽃 그림은 지극히 단순하다. 그러나 이 단순함의 빛깔 역시 서로 다르다. 평면구성에 가까울 만큼 꽃을 단순화해 감정개입을 배제하고 장식성을 강조한 한스 스탈더의 그림에 비하면, 흩날리는 꽃잎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안토니오 무라도의 그림은 서정적인 정밀묘사처럼 보인다. 그러나 꽃잎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적색과 녹색의 물감이 가벼운 붓질로 섞여있는 것일 뿐이다. 이처럼 얼핏 보이는 모습과 실제 현상 사이의 간극은 관람자에게 작은 충격을 불러일으킨다.
한편 꽃을 근접 촬영한 노부요시 아라키의 사진은 다른 작가들과 달리 자극적인 에로티시즘을 담고 있다. 시들어 가는 양귀비 꽃잎의 잔주름, 만개한 장미꽃의 속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의 사진 속에서 식물의 모습으로 치환된 내밀한 욕망을 읽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힘차게 하늘로 뻗어 올라가는 배병우의 소나무 사진은 노부요시 아라키의 작품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강인한 남성미를 담고 있으면서도 거칠지 않고 은은한 흑백 사진은 한 폭의 문인화인 듯 절제된 풍경이 돋보인다. 이렇듯 여섯 작가의 작품은 단순성과 장식성, 절제와 욕망 등 미묘한 차이를 보이며 공존하는 식물의 상징성을 외부로 표출시켰다.
큐레이터 출신 화랑주의 예리한 눈썰미 돋보여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가들은 pkm갤러리 대표 박경미가 국제적 성장 가능성이 높은 작가 중심으로 선별했다. 박 대표는 1989년부터 1999년까지 국제화랑 큐레이터로 재직했고, 사임 후 독립 큐레이터로 나서 2001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로 활동하는 등 미술계 동향에 밝은 실무형 화랑주로 정평이 났다. 최근 들어 대다수의 화랑이 내실 있는 기획전 대신 대관전이나 레스토랑 운영 등 수익사업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 현실이지만, pkm갤러리는 “앞으로도 대관전을 배제하고 기획전 중심으로 갤러리를 운영해 유망작가를 육성할 예정”이라고 밝혀 귀추가 주목된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무료이며, 자세한 문의는 02-734-9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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