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 22. 2002 | 어떤 일에 오래 몸담을수록, 또 그 일에서 대가라는 평을 받을수록 자기복제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도 높아진다. 대중과 평단의 호평을 받는 기존 양식을 버리고 새로운 시도를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운보 김기창 화백 1주기를 맞아 4월 7일까지 덕수궁미술관 제1∼4전시실에서 개최되는 ‘바보천재 운보그림’전은 놀랍다. 주제를 달리할 때마다 한 사람이 그린 것으로 믿기 어려울 만큼 화풍이 독창적으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네 명의 운보를 만나는 듯 다채로운 화풍 선보여
이번 전시는 운보의 작품세계에 대한 연대기적 분류를 지양하고 주제별로 나눈 것이 특징이다. 1950년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제작된 작품 1백여 점은 입체파적 풍속화, 예수의 생애, 바보산수·바보화조, 추상의 세계 등 네 가지 주제로 나뉘어 전시됐다. 그런 만큼 각각의 전시실마다 서로 다른 네 명의 운보가 살아 숨쉬는 듯하다.
예컨대 제1전시실에 전시된 운보의 1950년대 풍속화는 굵고 힘찬 외곽선과 과감한 생략으로 ‘입체파적 풍속화’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파격적인 한국화를 보여준다. 운보는 정물이나 산수 같은 고답적인 화제를 벗어 던지고 구멍가게, 시장 바닥에서 일하는 아낙 등 사람냄새 나는 풍경을 그림 속에 감싸안았다. 민중의 삶 속에 담긴 애환과 소박한 정서에 천착했던 운보는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보다 자유롭고 활달한 필치의 그림들을 선보이는데, 제3전시실에 마련된 민화 풍의 ‘바보산수’와‘바보화조’가 그것이다.
아내이자 동료였던 우향 박래현을 잃고 긴 침묵 끝에 분출하듯 그려낸 바보산수와 바보화조는 단순하지만 생동감 넘치는 세계를 담고 있다. 아무렇게나 쓱쓱 그려낸 듯한 산 속에 멋대로 뛰노는 사슴 한 쌍, 약간 사팔뜨기가 된 눈으로 어리숙하게 정면을 바라보는 새 등, 어린아이의 마음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소박한 이상향은 보는 이의 마음에 채워진 빗장마저 풀어놓게 만든다. 어린아이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바보, 한눈 팔지 않고 우직하게 외길을 걷는 바보는 청각장애의 고통을 딛고 오직 창작에만 전념해온 운보의 자화상이었다.
우직하게 외길을 걸었던 ‘바보천재’ 운보 예술의 진면목
한편 제2전시실에 전시된 1950년대 ‘예수의 생애’ 연작 30여 점은 갈색 머리에 푸른 눈을 한 서양인 대신 한국 풍속화의 전통 속에서 새로운 예수의 모습을 창출해낸 점이 돋보인다. 선녀의 모습을 한 천사가 물레를 잣던 마리아에게 예수 탄생을 예고하는 장면이나, 갓 쓰고 도포를 입은 중년의 예수 등, 수태고지부터 부활에 이르는 전 과정이 한국의 풍광 속에 되살아나 흥미롭다. 또한 제4전시실에서는 노년에 이른 운보가 붓 대신 봉걸레에 먹을 적셔 일필휘지로 완성해나간 추상화 대작들과 문자추상 등 전통과 현대적 요소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실험적인 작품들이 전시돼 눈길을 끈다.
전시를 기획한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예술에 대한 한없는 경외심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극복한 천재 운보의 인간적 면모를 압축한 것이 ‘바보천재 운보그림’이라는 전시명”이라고 밝히고, “운보라는 거인에 가려진 운보 예술의 진면목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이번 전시의 취지”라고 설명했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25세 이상 5천원, 19세∼24세 4천원, 초·중·고생 3천원이다. 문의전화 02-779-5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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