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 28. 2002 | 지난해 인터넷에서만 개봉해 인기를 끌었던 패러디영화 ‘다찌마와리’를 보면 시골에서 갓 상경한 화녀와 충녀가 삼일빌딩 앞에서 성공을 기약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웃음의 종류는 두 가지다. 처음의 웃음은 옛날영화를 패러디한 장면이 황당하고 우습기 때문이지만, 그 웃음이 사라질 때쯤 씁쓸하게 입가에 맴도는 두 번째의 웃음은 도시의 현실이 그리 만만치는 않다는 자조에서 나온다. 생존경쟁과 빈익빈 부익부 현상, 환경오염에 시달리는 오늘날의 도시가 과연 유토피아일 수 있을까.
사라져버린 꿈과 이상에 대한 그리움
하지만 허울뿐인 꿈의 공간이라 해도 익숙한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날 자신이 없다면, 차선책을 찾는 수밖에 없다. 일민미술관 제2전시실에서 2월 20일부터 4월 7일까지 개최되는 재개관 기념전 ‘도시에서 쉬다’는 도시의 팍팍한 삶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대안을 모색했다. 김호석, 정세라, 최진욱, 황인기(이상 회화), 정연두, 주명덕(이상 사진), 염은경, 한계륜(이상 설치) 등 8명의 작가들은 때로는 사실적으로, 때로는 꿈과 이상의 힘을 빌어 일상의 무게를 덜어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작품은 ‘꿈을 현상해주는’ 작가들이다. 예컨대 정연두는 아르바이트 청소년들의 남루한 현실과 이상 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극적으로 대비시킨 연출사진을 보여준다.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소년은 정연두의 사진 속에서 카 레이서가 된다. 소년이 손에 들었던 주유기는 우승트로피로, 기름때에 절은 작업복은 반짝이는 유니폼으로 바뀐다. 당당하게 서서 관람자를 바라보는 소년의 사진은, 꿈이 없다면 어떻게 고된 현실을 견딜 수 있는지 질문하는 듯하다. 한편 염은경은 자연 이미지와 고궁 사진, 깃털 등을 조합한 비디오 설치작업 ‘햇빛 속의 산책’에서 붕괴되어 가는 도시 속 자연에 대한 애틋함과 이상향에 대한 동경을 표현해 눈길을 끌었다.
이밖에도 전시된 대부분의 작품은 도시생활의 단면을 담백하게 전달한다. 얼굴을 잔뜩 긴장시키고 TV 삼매경에 빠진 가족(김호석), 점묘화를 그리듯 레고블럭으로 재창조한 달동네의, 가난하지만 정겨운 풍경(황인기), 밤의 불빛과 속도감이 어우러진 몽환적인 야경(정세라), 인적 드문 아파트를 오가는 자동차의 쓸쓸한 뒷모습(최진욱) 등이 그것이다. 이들의 작품에서는 도시 속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속에서 ‘쉼표 같은 순간’을 발견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예술이 세상을 직접적인 방법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어려울지 모르지만, 최소한 인식의 계기를 제공할 수는 있다. 도시의 삶이 팍팍하고, 이를 견디기 위해 어떤 방식이든 모색해야 한다면, 어떤 방식을 선택할 것인지는 이제 관람자의 몫으로 남는다.
평범한 도시생활의 단면 담백하게 그려
‘도시에서 쉬다’ 전의 책임기획을 맡은 일민미술관 큐레이터 원형준씨는 도시를 ‘일터인 동시에 쉼터이자 고향’으로 정의하고, “빠름의 시대 속에서 과속 질주하는 현대인들이 한 걸음 물러나 가쁜 숨을 추스릴 수 있는 시간을 만들자는 것이 기획의도”라고 설명했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1천원이며, 월요일은 휴관한다. 제1전시실에서는 1996년 일민미술관 개관 이후 열렸던 과거 기획전들을 회고하는 ‘전시를 보다’전도 관람할 수 있다. 문의전화 02-2020-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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