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 08. 2002 | “잘 죽는 것은 잘 사는 삶의 정점”이라는 로버트 풀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죽음은 당사자나 주변 사람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체험 중 하나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갤러리현대 지하 1층∼2층에서 3월 12일까지 열리는 금속공예가 유리지(57, 서울대 교수)의 ‘아름다운 삶의 한 형식’전 역시 이런 맥락을 지닌다. 전시명에서 연상되는 것은 삶의 찬가지만, 작가는 역설적으로 장례용품을 선보였다. 여기에는 죽음을 공포의 대상이거나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닌, 삶이 완성되는 순간으로 받아들이는 작가의 의식이 반영됐다.
아름다움과 기능성 겸비한 매혹적인 장례용품
유리지는 통산 여섯 번째 개인전인 이번 전시에서 향로, 촛대 등 제사용품을 비롯해 골호, 사리함, 상청, 상여 등 전시된 장례용품 20여 점을 선보인다.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화장된 뼈를 담는 항아리인 골호(骨壺)다. 화장문화가 일반화되지 않은 한국에서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그의 손에서 태어난 골호는 아름다움과 유용성을 겸비해 감탄의 소리가 절로 흘러나올 만큼 매혹적이다.
특히 2002년 제작한 ‘골호-삼족오’는 은을 세공해 까끌까끌한 타조알 모양의 둥근 단지를 만들고, 뚜껑에는 태양과 인간을 연결하는 전령 역할을 한다는 전설의 새 삼족오(三足烏)를 섬세하게 조각해 붙였다.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알 속에 돌아가신 이의 뼈를 담아 상징성을 살리면서 미적인 측면도 충분히 고려한 점이 돋보인다.
유리지는 한국 공예사에서 모더니즘 제1세대로 꼽히는 작가지만, 전시된 작품의 면면을 살펴보면 기존의 모더니즘적 성향과 더불어 최근 작가가 전통미학적 요소에 애착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2지 동물과 골호 운반용 상여 등 전통의 향기가 물씬 나는 작품들과 함께 간결하고 현대적인 디자인의 촛대·향로가 한 공간에 전시된 것은 단적인 예다.
매장 중심의 장례문화 대신 화장문화 전파해
그러나 작가가 선보이는 작품들은 단순히 옛 전통을 현대적으로 되살린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다양한 디자인의 골호를 선보이고 가족 납골당을 설계함으로써 매장 중심의 장례문화에서 탈피하는 대안으로 화장을 설득력 있게 전파한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현세의 영화를 무덤까지 지속하기 위해 장례의식에 치중한다. 그러나 화려한 비석과 석물로 무덤을 치장하고 명당을 찾아 헤매는 구습을 답습하기 이전에, 어떻게 하면 자신의 삶을 간소하게 정리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것도 필요하다. 평범한 일상적 사물에 아름다움과 유용성을 함께 부여하는 것이 공예의 역할이라면, 유리지의 작품은 장례문화에 대한 의식적 전환을 추구한다는 또 한 가지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무료이며, 관람시간은 오전 10시∼오후 6시까지다(월요일 휴관). 자세한 문의는 02-734-6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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