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뷰-제품 | 전시 | 공연

섬세하고 매혹적인 네크로필리아의 꿈

by 야옹서가 2002. 3. 15.

Mar. 15. 2002
| 가늘고 검은 선이 마치 실핏줄처럼 스멀스멀, 종이 위를 치밀하게 뻗어나간다. 그물 짜듯 이어지는 선의 흐름 끝에서 윤곽을 드러낸 형체는 짐승 같기도, 사람 같기도 한데 피부는 온데간데없고, 적나라하게 드러난 근육다발은 툭툭 끊겨 나풀거린다. 두 눈알은 밖으로 튀어나와 더듬이처럼 늘어지고, 살점 하나 붙어있지 않은 하얀 뼈마디도 눈에 밟힌다.

해골의 형상을 한 뮤즈와 공중그네를 타듯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지만, 이것은 3월 19일까지 대안공간 풀에서 열리는 김경태 개인전의 광경이다. 선을 긋는 손이 두려움에 떨릴 법도 하건만, 만약 작가의 손이 떨린다면 그것은 공포 때문이 아니라 희열을 주체하지 못해서일 것이다. 얼핏 보기에도 김경태가 자신의 피조물에 갖는 애착은 네크로필리아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는 이상심리이기보다는 죽음 속에서 산 기운을 이끌어내는 창조자로서의 감정에 가깝다. 이를테면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조각난 시체를 꿰매고 전류를 흘려 넣을 때 작업대 앞에서 느꼈음직한 희열과 유사한 것이다.

 전시된 작품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입구가 시작되는 곳부터 한쪽 벽면 끝까지 10m에 가까운 크기로 그려진 대작이다. 척추, 두개골, 근육, 치아, 내장, 손목뼈, 안구 등으로 짐작되는 모호한 형체가 새의 발, 꽃봉오리, 소라고동 등의 형상과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모습은 정체불명의 생명체와 공중그네 타기를 하는 사람을 볼 때처럼 긴장감을 유발시킨다.

김경태의 세계 속에는 어두운 것, 습한 것, 안개와 그림자와 연기, 불규칙한 것, 날카로운 것, 점액질인 것, 식물적인 것이 뒤엉켜 떠돌고 있다. 이 같은 요소들의 기묘한 혼합은 그의 작품을 지극히 몽환적인 것으로 만든다. 꿈을 있는 그대로 기술한 것처럼 모호한 작가노트를 읽다보면 ‘해부대 위에서 우산과 재봉틀이 우연히 만나듯’ 충돌하는 이미지는 더욱 강렬해진다.

“…꿈을 꾸다보면, 당신도 벌거벗은 육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벌거벗은 육신은 당신의 뇌를 파먹고 알을 까는 파리 떼, 그 한 귀퉁이에 빌붙어 어둠을 노래하는 박쥐, 당신도 두려움에 눈물을 머금을 것입니다. 당신의 아름다운 뮤즈를 찬미하는 당신 모습을 보면서….”

세밀하게 그려낸 황량한 꿈의 세계
직접적이고 자극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영상예술이나 작품의 규모로 관람객을 압도하는 설치미술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현실에서, 세밀화에 가까운 방법을 선택해 모든 작품을 일일이 손으로 그려나가는 김경태의 드로잉은 오히려 참신하게 보인다. 단, 그의 작품은 전시장에서 직접 맞부딪치지 않으면 참 맛을 느낄 수가 없다. 백주 대낮에 눈을 뜨고 다른 사람의 꿈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이 그리 쉽겠는가. 뼈만 남은 두 팔을 벌리고 관람객을 맞이하는 그의 뮤즈와 살을 맞대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본 전시의 관람시간은 오전 11시∼오후 7시까지이며 수요일은 8시까지 연장 개관한다. 관람료 무료. 자세한 문의는 02-735-480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