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 22. 2002 | 외부 세계는 너무나 크고 위압적으로 느껴지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왜소한 몸과 정신으로는 어떻게 대응할지 몰라 두렵고 막막한 순간이 있다. 그런데 당사자에게는 너무나 버거운 그 세계가,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막 걸음마를 내딛는 어린아이의 발 앞에 놓인 계단 한 단이 아이에게는 엄청난 도전이지만, 어른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럴 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인데, 스스로를 확장시켜 바깥세계로 한 걸음을 내딛던가, 아니면 소인국에 간 걸리버처럼 외부 세계를 축소시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장 과정에서 경험하는 반면, 후자의 경우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상징적인 퇴행의 힘을 빌리면 가능하다. 3월 9일부터 4월 6일까지 대안공간 루프에서 열리는 경현수 설치전은 불가피하게 상징적 퇴행 속에서 구축한 소인국의 풍경을 담았다.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작고 여린 세상
경현수가 자신만의 소인국을 짓는 재료로 선택한 것은 이쑤시개보다 굵고 면봉보다 가는 굵기의 나무토막이다. 길이가 채 2cm가 될까말까한 나무토막이 하나, 그 옆에 그와 닮은 나무토막이 또 하나…. 혼자서는 보잘것없었던 나무토막들은 그렇게 하나둘 살을 맞대면서 기찻길이 되고, 무지개다리가 되고, 집이 된다. 뼈대만 앙상한 구조물은 한번이라도 발걸음을 잘못 놀리면 순식간에 부서질 만큼 가냘프지만, 작가는 연약한 꿈의 세계를 스스로 구축함으로써 분열된 세계 속에서 내적 평화를 찾는다.
그러나 전시장 전면이 이처럼 수평적인 구조물만으로 채워진 것은 아니다. 이끼처럼 바닥을 따라 달리던 구조물의 수평성이 외부세계를 안전하고 통제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작가의 내면을 상징한다면, 어느 순간 솟아올라 숲과 탑과 고층 빌딩이 되는 구조물은 작가가 내적 퇴행의 단계를 벗어나 도약을 꿈꾸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 자양분이 되는 것은 작가의 유년시절 추억을 연상시키는 장난감 비행기와 초록색 물감이다.
바닥에 드문드문 놓인 낡은 장난감 비행기는 언뜻 보기에 좌절된 꿈을 상징하는 듯하다. 전투기이긴 하지만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초라한 몰골은 전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게 생겼다. 나무토막이 그런 비행기의 몸체를 관통하면서 하늘을 향해 치솟고, 그 주변에서 초록빛 물감이 스며 올라가는 모습은 마치 비행기가 추락해 상처를 입고 초록빛 피를 흘리는 듯, 초현실적인 상상마저 유발시킨다.
수작업으로 차곡차곡 쌓은 내적 치유의 과정
그러나 비행기의 피 흘림은 죽음이 아니라 재생을 위한 밑거름이다. 이는 초록빛 물감이 바닥에 고이는 대신 상승하면서 작가의 내적 에너지를 고양시키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초록색이 전통적으로 치유를 의미하는 빛깔이라는 것도 주목할 점이다.
작가는 서서히 구조물의 규모를 키워가면서 종국에는 어른 키와 맞먹는 거대한 덩어리를 완성해냈다. 바닥에 깔린 작고 초라한 구조물부터 세포가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성장하듯 하늘을 찌르는 수직적 구조물에 이르기까지 보이는 극명한 대조는 작가가 고된 수작업을 거쳐 작품을 제작하면서 차곡차곡 쌓아나간 내적 치유의 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무료이며, 개관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8시까지다. 자세한 문의는 02-3141-1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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