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 29. 2002 | 갤러리인에서 4월 5일까지 열리는 황인기(49, 성균관대 교수)의 6번째 개인전 ‘디지털 山水’전에는 낯익은 그림들이 등장한다.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전시된 작품 속 이미지에는 원본의 윤곽이 남아있지만, 5∼6미터는 족히 됨직한 전시장 벽을 가득 메울 만큼 거대한 규모는 원본이 지닌 정서를 압도하며 황인기의 작품에 새로운 맥락을 부여한다.
단순하지만 강한 1비트 이미지
작가가 그려낸 사본 이미지가 원본보다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농묵, 중묵, 담묵이 자연스럽게 뒤섞인 원본의 명암처리를 1비트 이미지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흐릿한 부분은 날아가버리고 짙은 부분은 더욱 강조된 이미지는 입체감을 잃은 대신 극적인 명암대비로 인해 더욱 강렬해졌다. 또한 레고 블록, 실리콘 덩어리, 인조보석 등을 점찍듯 붙여 완성한 작품은 멀리서 바라볼 때와 가까이 들여다볼 때의 모습이 크게 달라 경이롭기까지 하다.
예를 들어 정선의 금강전도를 모사한 ‘방(倣) 금강전도’(2001)는 노란 바탕판에 검은색 레고 블록을 점찍듯 일일이 손으로 붙여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도 금강전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단순히 검고 노란 얼룩처럼 보일 뿐이다. 조선시대 회화에 대한 기본 지식을 전제로 한 이 그림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이미지로 재창조된다. 이는 윤두서의 자화상을 각각 양각과 음각으로 변환하고 스테인리스 스틸 위에 검은 실리콘 덩어리를 규칙적인 간격으로 짜 넣어 완성한 ‘27kg짜리 윤두서와 33kg짜리 윤두서’(2001)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기발하지만 경박하지 않은 과정을 거쳐 완성된 그림은 동양화도 서양화도 아닌 중간자적 위치에 있다. 서구미술을 수용하는 근대미술 구축과정에서 고유의 정체성이 모호해진 한국미술을 빗대어 디지털 이미지로 조선시대 회화를 변환한 작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황인기는 재료 측면에서도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물감이 아닌 산업사회의 부산물을 대신 사용함으로써 ‘작품이면서 작품이 아닌 작품’으로서 풍자적 역할을 부여한다.
한국현대미술에 대한 풍자적 질문
그의 그림 속에 숨은 풍자성은 추사의 세한도를 입체작품으로 재현한 ‘세한 연립주택’연작(2002)에서 두드러진다. 초가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세한도는 추사의 그림과 똑같은 모습으로 복제됐지만 채색만 달리해 청동유물, 철기유물, 금동유물 등의 부제를 달고 있다. 실상은 싸구려 합성수지이지만, 마치 오래된 유물처럼 채색을 달리해 국보급 유물처럼 단장된 세 점의 작품은 한때 유행처럼 번졌던 한국적인 것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질문한다. 그 질문의 목소리는 전통의 현대적 해석이 소재주의라는 함정 위를 살짝 가린 앙상한 나뭇가지일 수 있다고 경고하는 듯하다. 타인을 향해서, 혹은 작가 자신을 향해서.
전시 관람료는 무료이며, 전시기간 중 휴관일은 없다. 문의전화 02-732-4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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