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 05. 2002 | 코스프레. 만화주인공과 똑같은 복장을 하고 만화 속 장면을 연출하는 ‘코스튬 플레이(costume play)’를 일본식 약자로 일컫는 표현이다. 관훈동 갤러리창에서 4월 9일까지 열리는 김학민의 네 번째 개인전 ‘판타지 앤 일루전’전은 이 코스프레를 소재로 한 전시다. 《키즈아토》의 메이드, 《카논》의 마이, 《블랙 매트릭스》의 미제트 등 유화로 재현된 깜찍하고 발랄한 만화주인공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사실주의적 인체작업을 주로 해 온 김학민은 ‘딸기사라’란 닉네임으로 유명한 코스튬 플레이어 강지혜와 함께 이번 전시를 준비했다. 강지혜가 직접 제작한 만화 캐릭터의 의상을 입고 포즈를 취하면, 김학민은 무반사 유리 위에 그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유리 뒤에 디지털 이미지로 출력한 배경사진을 붙이고 스모그와 조명을 적절히 혼합해 전시함으로써 실제 코스프레 무대와 같은 공간이 구성되고, 가상의 만화 캐릭터는 보다 생생한 생명력을 갖는다.
또한 전시장에 마련된 3대의 모니터에는 게임, 애니메이션, 모델인 코스튬 플레이어의 홈페이지 등이 떠 있어 코스프레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관람자도 놀이하듯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실제 코스프레 무대를 보듯 생생한 재현
예를 들어 2001년 작 ‘마이(카논)’는 앳된 소녀의 몸에 파괴력과 성적 매력을 지닌 성인 여성의 이미지가 혼재된 일본 만화의 전형적 캐릭터를 보여준다. 비현실적으로 푸른 하늘과 붉게 타오르는 땅을 배경으로 서 있는 여전사 마이는 군인의 제복과 여학생 교복을 기묘하게 배합한 빨간 원피스에 검은 부츠를 신고 있으며, 중세시대에나 등장할 법한 전투용 칼은 강해지고자 하는 욕망을 강화하는 소도구로 사용된다.
적어도 코스튬 플레이어들에게 코스프레는 변신에 대한 욕망을 가상으로 충족시키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을 현실세계에서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욕망의 배출구다. 정교한 옷과 장신구를 제작할 능력이 되고 거기에다 연기력이 뒷받침되는 코스튬 플레이어에겐 실제로 열성적인 팬클럽이 따르기도 한다. 남루한 현실을 벗어난 특별한 삶에 대한 욕망이 들끓는 이들에게 코스프레는 매력적인 변신 수단이다.
여장을 한 마르셀 뒤샹을 찍은 만 레이의 사진 ‘로즈 셀라비’ 이래, 변장을 모티브로 한 수많은 작품들이 등장했다. 대중문화와 미술사에 등장하는 도식적 여성 이미지로 분장하고 셀프 포트레이트를 찍었던 신디 셔먼은 그 대표적 예다. 국내에서만 보더라도 이불, 권여현, 박혜성 등 서로 맥락은 다르지만 변신을 모티브로 작업하는 작가들이 다수 존재했다.
지리멸렬한 삶을 뒤집고 주인공이 되는 변신의 순간
그러나 앞서 열거한 작가들이 분열증적 자아를 발견하는 도구로 변신 모티브를 이용하면서 독특한 아우라를 구축했다면, 김학민의 코스프레 그림은 작가의 개성을 최대한 지운다는 측면에서 서로 다르다. 그의 그림은 객관적인 묘사로 대상의 욕망을 두드러지게 하는 일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전시의 일부인 코스튬 플레이어 강지혜 홈페이지에서는, 대중문화의 환상 속에 숨은 욕망이 현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명쾌하게 확인할 수 있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무료다. 자세한 문의는 02-736-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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